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치羞恥. 부끄러울 수, 부끄러울 치. 부끄러운이 두 번이나 들어갔으니 얼마나 심한 부끄러움일까요. 죄의식보다 훨씬 폭넓고 복잡하며 깊은 경험을 내포하는 수치심은 단순히 개인적 감정을 넘어 도덕적, 사회적, 심리적, 정치적 차원을 넘나듭니다.


사실 우리는 범법자가 아닌 이상 죄의식보다는 수치심을 더 내밀하게 경험하지 싶습니다. 그리고 수치심 그 자체보다 수치심에 따라오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더 무서워합니다.


자기멸시와 침묵을 강요하는 슬픔이 포함된 수치심이 있는가 하면, “염치도 없는 자”라는 분노의 외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슬픔과 분노의 혼합물인 이 수치심에 대해 철학적 사유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셸 푸코 연구자이자 파리12대학 파리정치연구소 정치철학 교수로 재직하는 프레데리크 그로입니다. 전작 <불복종>의 원동력이 되는 것으로 그는 수치심을 끌어옵니다. 불복종할 힘을 주는 것은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라고 말이죠.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에서 수치심을 지렛대 삼아 파괴적 슬픔, 자기 경멸을 제거하고 순수한 분노로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수치심은 심리학적 치료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정서는 부차적이며, 추락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상황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파키스탄에서는 여전히 매년 천명 이상의 여성들이 가문을 수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죽임당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디지털은 가상세계가 아니라 실재하고 있습니다. 사이버폭력의 희생양들은 존재함에도 그들을 위한 디지털 회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치는 사회적 멸시를 내면화한 결과라고 합니다. 가난, 상사의 모욕 등을 이유로 받은 타인의 멸시는 이내 자기멸시로 바뀝니다.


아니 에르노는 수치심의 특별한 재능으로 기억을 손꼽았습니다. 사회적, 정신적, 신체적 영역에서 타격받습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성폭력 및 근친상간의 희생자들은 죽을 때까지 저항해야 하는가라고 되묻습니다. 살아있기에 불리해지는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수치의 경험은 흔적을 남기기에 트라우마를 유발한다." - p101





수치심의 반대말은 몰염치입니다. 수치심이 없는 몰염치한 사람으로부터 수치심을 받는다는 게 참 아이러니합니다. 수치심의 동양적 의미는 움츠림, 조심성, 신중함입니다. 도덕적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도덕적 장벽으로서의 수치심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공자는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리면 사람들은 수치심도 알고 스스로 마음을 올바르게 할 줄도 알게 되지요”라며 수치심을 관망의 태도, 더불어 살기, 행복 추구를 위한 윤리적 자질로 삼습니다.


수치심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이어나가는 프레데릭 그로 저자의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개인의 부정적 감정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힘으로서 수치심의 영역을 확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영화, 소설, 철학자들의 사상들에서 건져올린 수치심의 사례를 무수히 쏟아냅니다. 프로이트, 니체, 푸코, 플라톤, 사르트르, 라캉 등 철학자들이 펼치는 지적 향연이 풍성합니다.


“철학의 본래 기능은 수치심을 안기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는지, 그가 아는 것을 어디까지 아는지 자문하게 만들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것은 아는 척하던 이들에게 더 명료하게 밝히라며 난감하게 만들면서 수치심을 안겨줬기 때문입니다.


발자크, 카뮈, 카프카, 모파상, 도스토예프스키, 프리모 레비 등 유명 작가들의 소설 속 수치심 사례를 알아갈수록 읽어보고 싶은 소설 리스트가 점점 늘어납니다. 특히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의 작품에 수치심과 관련한 내용이 꽤 많길래 작가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수많은 장치들-공장, 사무실, 학교-에 대해서는 저자가 각각 책 한 권씩 쓸 수 있다고 얘기할 만큼 가벼운 주제가 아닙니다. 철학적 용어의 일부는 어렵긴 했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수치심을 다룬 주제인 만큼 제법 흥미진진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마르크스가 쓴 편지에 있는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수치심은 이미 하나의 혁명입니다. (중략) 수치심은 일종의 분노입니다. 억눌린 분노. 온 나라가 정말 수치심을 느낀다면 그건 달려들기 위해 움츠린 사자 같을 것입니다.”


저자는 수치심에 동반하는 분노에 주목합니다. 우리를 깎아내리는 평가, 가치를 실추시키는 모욕, 굴욕적인 실패 속에서 분노는 복수의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정치적, 집단적 분노, 방향을 띤 분노의 형태를 취할 때 분노는 정화되고 승화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분노를 잘 이용해야 합니다. 세상과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에 속한 수치심을 투사의 힘으로 발현하는 겁니다. 더불어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집단적 분노를 일깨우기 위한 연민은 상상력에서 탄생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타인들을 대신해 수치심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는 체념하지 않고 저항할 능력으로 전환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저 감정으로만 치부했던 수치심에 대해 이토록 깊게 생각해본 경험은 처음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