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기억들
마리야 스테파노바 지음, 박은정 옮김 / 복복서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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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올가 토카르추크, 스베틀리나 알렉시예비치에 이어 앞으로 가장 많이 회자될 작가"로 평가받은 마리야 스테파노바 작가의 소설 <기억의 기억들>.


푸틴 체제에 반대해 베를린으로 망명 후 예술, 문화를 전문으로 하는 러시아 독립 미디어 콜타의 편집장인 그는 이 소설로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요. 저널리스트 이력다운 필체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소설은 이전 세대가 겪은 사건이나 경험이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일컫는 '포스트메모리 Postmemory'를 소설로 구현한 작품입니다. <기억의 기억들>에서는 유대계 러시아인인 조상들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와 기억의 교차점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모 갈카가 돌아가신 후 시작합니다. 고모에겐 하나하나 의미 있었을 물건들이 갑자기 평가절하된 상태로 쓸쓸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고모의 집을 정리하며 깨닫습니다. 인간의 온기를 잃어버린 채 더이상 어떤 기억도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된 겁니다.


그곳에서 '나'는 고모의 일기장과 공책들을 가져옵니다. 일기는 문서화된 고모의 삶이 담겨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떤 날은 놀랄 만큼 상세했고 어떤 날은 놀랄 만큼 불명확합니다. 고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주는 단서는 없었습니다. 단편적으로 세세하게 기록한 사실들뿐이었습니다.


"마치 매년 완성되는 일기장 속의 매 기록이 가진 중요한 임무는 정확하게 자신의 외적인 삶에 대한 신뢰할 만한 증거를 남기는 일 같았다. 진짜의 삶, 진정한 내면의 삶은 자신 안에만 남기기. 모든 것을 보여주기. 모든 걸 숨기기. 그리고 영원히 간직하기." - p21





그렇게 시작한 고모의 삶에서 시작해 조부모, 증조부모 등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상들의 이야기로 확장합니다. 가족의 삶을 요약하고 하나의 이야기로 모으기로 합니다.


그런데 기억을 떠올리려고 해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만 또렷이 느껴집니다. 이름도 기억 못 합니다. 기억하는 이야기조차 실제 있었던 일인지 믿기 어렵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도 전해진 이야기인지,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족에 관한 내 책은 가족에 관한 것이 아니다. 무언가 다른 것. 아마도 그건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기억이 나에게 원하는 것에 대한 글이 되리라." - p56


윗세대의 가족사진, 일기, 편지, 옛날 신문 기사, 공문서 등을 찾아내며 기억을 복원하는 '나'.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양한 기록물들을 마주하며 역사 속에 존재했던 그들을 끄집어냅니다. 물론 그들은 어둠에 숨기를 결정한 것처럼 쉽사리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포스트메모리 개념은 이 소설 전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재에서 매일 일어나는 모든 것의 열쇠가 과거임을, 개인적인 가족의 눈과 구술의 기억으로 전승되어온 유럽 유대인의 삶에 깃든 트라우마-상처와 연결고리를 짚어줍니다.


그리고 독자는 '나'의 가계도 탐험에 적극적으로 참관하게 됩니다. 휘발되지 않도록 기억을 기억하도록 '나'의 여정은 기억을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지 탐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가족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겠다는 삶의 과제는 사실 가족을 위한 게 아니라 결국 '나'의 이야기임을 보여줍니다.

 

<기억의 기억들>은 문학적 언어보다는 저널리즘에 가까운 언어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소설인지 논픽션인지 경계가 흐릿한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마음에 쏙 들 겁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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