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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와의 키스
케이시 지음 / 플랜비 / 2023년 2월
평점 :
절판

보물 같은 작가 케이시의 소설 <대지와의 키스>. 노숙자가 된 헤드헌터의 생존기를 그려낸 소설입니다. 이 멋진 소설의 결말을 고이 감춘 채 소개를 드리자니 입이 근질거립니다. 반전소설의 스포를 경계하는 분을 위해 최소한의 내용만 오픈합니다.
케이시 작가의 데뷔작 <네 번의 노크>는 영화계에서 먼저 눈도장을 찍어 영화화 계약될 만큼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소설이라면, 두 번째 소설 <0125>는 픽사 애니메이션을 능가하는 스토리텔링으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신작 <대지와의 키스>도 놀라움을 안겨주네요. 노숙자 신세가 된 냉소적인 헤드헌터가 기발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잘나가던 헤드헌터의 '일시적 주거 후퇴'. 이 단어만으로도 주인공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지금은 노숙자 신세로 살지만 자신은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고, 이 생활의 끝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걸 믿습니다.
헤드헌터로 일하다 연대책임 문장 한 줄로 인생이 꼬인 주인공. 금융 사고를 일으키고 잠수를 타게 됩니다. 그의 목표는 공소시효 기간 동안 잘 버티는 것입니다. 자고 먹는 일상이 노숙자와 다를 바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다른 노숙자들처럼 행동하진 않습니다. 유령처럼 존재감 없이 도시를 방황하면서도 나름 품위유지를 해냅니다.
"머리를 조금만 쓰면 길거리의 모든 게 공유 대상이 된다."며 분실물 휴대폰 충전기를 당당하게 챙기기도 합니다. 휴대폰의 전화 기능은 중지되었어도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라면 여전히 온갖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현금도 부족하고 집도 없는데 어떻게 먹고 잘까요. 서너 시간만 자도 거뜬한 쇼트 슬리퍼여서 잠자는 것은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카페에서 쪽잠을 잘 때는 근처 쓰레기통에 버려진 테이크아웃 컵을 주워서 들어갑니다. 대개는 마트 화장실 비품칸에서 잠을 청합니다. 마트에서는 마음 좋아 보이는 할머니 앞에 줄을 서고 계산대에서 지갑이 없어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면 너그러운 은혜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입니다. 자원봉사에서 힌트를 얻어 현금 기부를 받는 데에도 도가 텄습니다. 현금 부자가 될 만큼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상상 초월의 행각들이 펼쳐집니다.
"홈리스(Homeless)라고 해서 홉리스(Hopeless)가 되라는 법은 없다." - 책 속에서
그러다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폭동이 일어나고 도시는 폐쇄됩니다. 다행히 마트가 폐쇄되기 전 숨어드는 데 성공했고, 마트는 안전지대가 됩니다. 마트 청소 일을 하던 여자를 이곳의 대장으로 삼고 평소 마음에 뒀던 카페 직원, 임산부 노숙자와 함께 지내게 됩니다.
바깥세상이 뒤집어졌으니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협력합니다. 거리 생활을 할 때부터 처세술이 남달랐던 '나'는 폐쇄된 상황에도 제법 잘 대처합니다. 드론을 띄워 주변을 탐색하며, 고립되었지만 안전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합니다. 희망, 절망, 사실, 거짓을 적절히 배합해서 말이죠.
이 소설에서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청소 여자는 대표로, 카페 직원은 콩, 임산부 노숙자는 긴 머리 등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별명으로 부릅니다. 때로는 로맨틱하게 때로는 침입자들의 위협을 물리치며 긴장감 넘치는 생활이 이어집니다.
임신한 노숙자 긴 머리와의 대화에서 '대지'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노숙자 신세이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려는 긴 머리는 자신이 "무수히 많은 꽃을 피워낼 수 있는 대지"라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마음처럼 자애롭고 풍요로운 느낌인 대지. 소설 제목 대지와의 키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후반에 이르러서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약서 한 줄의 교훈을 처절하게 겪으며 거리 생활을 하다가 고립된 마트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이들과 생존하는 헤드헌터. 결말에 이르면 그제야 생략된 많은 부분들을 깨닫게 되면서 놀라운 반전에 머리를 짚을 일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픈한 내용만으로 이 소설을 섣불리 판단하지는 마시길. 헤드헌터의 적나라한 마음을 빈틈없이 따라가는 스토리텔링과 독특한 전개 방식 덕분에 책장을 덮은 순간 바로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