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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과 아코디언
권미경 지음 / 좋은땅 / 2022년 9월
평점 :
거북과 일생을 늘 함께해야 하는 거북이 등껍질. 떼어 내 버리고 싶어도 금이 가거나 부서지기라도 하면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입니다. 무거운 등껍질 탓에 엉금엉금, 느릿느릿한 것만 같습니다. 당신에게도 무거운 짐처럼 붙어있는 게 있나요...
<색소폰과 아코디언>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있는 형우와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오빠가 있는 은숙의 이야기입니다. 거북의 등껍질처럼 숙명처럼 붙어있는 가족을 돌봐야 하는 그들의 사연. 도무지 해피엔딩이 될 것 같지 않은 상황 탓에 몇 장 넘기자마자 소설의 결말이 진심 궁금해졌습니다.
구두회사에서 일하는 형우는 회장 딸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불안합니다. 회장이 형우를 사윗감으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데다가 치매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여자친구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집 얘기만 나오면 예민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형우의 아버지 만복의 치매 증세는 심각하다가도 시설에 보내려 하면 멀쩡해지니 어쩔 수 없이 도우미를 불러 집에서 돌보고 있습니다. 도우미 아줌마들도 학을 뗄 정도라 매일이 스트레스입니다. 연극배우도 하고, 삐에로 분장을 하며 봉사활동도 다니고, 색소폰 연주도 할 줄 아는 만복의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보육원 출신 은숙은 발달장애가 있는 오빠 진철을 데리고 다니며 하루하루 벌어 살아갑니다. 아코디언을 연주할 줄 아는 오빠와 함께 약을 팔기도 하고, 고깃집 불판을 닦고, 업소 홍보도 뛰면서 단돈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온갖 일을 합니다.
"하루하루가 모두에게 살얼음판이고 전쟁터다. 은숙과 진철이 그러하고 형우와 만복이 그러하다." - 책 속에서
만복의 증세가 심한 날엔 분노가 솟구쳐 할 말 못 할 말 다 퍼붓기도 하는 형우. 그러고선 이내 자괴감에 빠집니다. 여자친구에게도 점점 거짓말을 하게 되니 이제는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왔습니다. 형우는 매일이 가시밭길입니다. 집안 문제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계속 좋지 않은 일이 터집니다. 치매 노인을 혐오와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자친구의 모습에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하는 놈이 누군지 아냐? ... 치매 걸린 아버지 없는 놈." - 책 속에서
우연히 형우네 집으로 도우미 일을 하러 오게 된 은숙. 그날도 오빠 진철을 데리고 갔는데... 이럴 수가, 세상 근심 없는 만복과 진철은 서로 대화가 통하는 것마냥 찰떡 케미를 보여줍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색소폰과 아코디언처럼 만복과 진철의 하모니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다섯 살 아이 둘을 돌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은숙. 오빠를 돌봐온 오랜 노하우가 빛을 발합니다. 난장판이 된 집안 정도쯤은 은숙의 손을 거치면 이내 반짝반짝해집니다.
하지만 터질 게 결국 터집니다. 아버지에게 분노를 발산하게 된 형우. 가족이란 이름으로, 사랑이란 이름으로도 보듬을 수 없는 상태가 된 한 인간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한순간 정신이 잠깐 돌아온 아버지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형우와 은숙의 숨겨진 사연과 함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등장하며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권미경 작가가 연극, 영화배우 이력이 있는 데다가 극본을 쓰는 작가여서 <색소폰과 아코디언>도 읽자마자 시나리오를 읽는 느낌이었어요. 너무나도 현실적인 가슴 저릿한 대사도 많아 과몰입하며 읽게 되더라고요. 그릇된 욕망에 사로 갇힌 채 걸어온 그 길이 정녕 최선의 길이었는지 뒤늦게 후회해 보는 형우의 마음도 이해되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픔을 안고 서글프게 살아온 은숙의 분노도 이해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다운되는 분위기는 아닙니다. 기적 따위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버티게 하는 한 줌의 희망을 찾아냅니다. 숙명처럼 내게 붙어있는 짐에 허덕이는 소시민들의 감정을 어루만져 주는 인생 소설 <색소폰과 아코디언>. 기대 이상의 뭉클한 감동과 유쾌한 해피엔딩 가족 드라마를 만나 따스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