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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나 - 한없이 다정한 야생에 관하여
캐서린 레이븐 지음, 노승영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0월
평점 :

로키산맥의 인적 없는 황량한 땅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자발적 외로움을 견디며 살고 있는 그에게 매일 같은 시간 찾아온 야생 여우. 캐서린 레이븐은 그렇게 우연한 계기로 여우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캐서린 레이븐은 생물학자입니다. 과학자로서 여우를 연구 대상으로 취급할법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여우와 감히 친구가 되려는 마음도 없었지만, 결국 '우리 여우'라고 부르며 여우와 사귀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작은 읍내도 50킬로미터나 떨어진 외진 곳. 처음엔 박사후과정 중에 주말마다 들르는 것을 시작으로 대학과의 계약이 끝나고서도 오두막살이는 계속됩니다. 꾸준한 급여, 건강보험을 제공하는 직업 대신 오두막을 선택했습니다. 야생의 외딴 지역에서 사는 것이 그에게는 정서적 안정감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알려면 그의 성장 과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린 시절 가정불화에 시달리다 집을 나온 후 오롯이 홀로서기를 해왔습니다. 스스로 먹고살 일거리를 찾아 고독하게 살아온 캐서린 레이븐. 가족으로부터의 배신감은 그를 외톨이로 만들었고 사람과의 관계 맺음엔 젬병으로 만들었습니다. 도시 생활은 우리에 갇힌 듯 답답해합니다.
오두막살이를 하던 중 한 살배기 여우가 엄마 여우의 감시망을 피해 무단 침입합니다. 엄마 영역과 자신의 굴 사이에 위치한 오두막으로요. 그렇게 여러 달을 마주치다 이제는 "앙투안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란다."라며 캠핑의자에 앉아 저만치에 앉은 여우에게 책을 읽어주는 편안한 관계가 됩니다.
신기하게도 오후 4시 15분쯤 찾아와 평균 18분 남짓 앉아 있다가 떠나는 여우. 함께 하는 시간의 끝은 언제나 여우가 정했습니다. 여우가 먼저 돌아서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 되었습니다. <여우와 나>에서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뿐만 아니라 허먼 멜빌의 『모비딕』, 닥터 수스의 책 등을 읽으며 여우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캐서린 레이븐은 사실 여우와의 관계에 오히려 부정적이었습니다. 야생동물을 인격화하는 것은 감상적이고 꼴사나운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적어도 자신처럼 훈련받은 과학자라면 말이죠. 대학을 떠나 황무지로, 다시 학계로 돌아갔다가 재차 황무지로 돌아오길 반복하던 그에게 야생의 관찰 대상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야생 여우만큼은 달랐습니다.

상자에 갇힌 애완동물과는 다른 야생의 존재들. 상자에 갇히지 않은 동물에게 삶은 언제나 위태롭습니다. 잡초를 뽑을 때도, 길을 낼 때도 그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밀도 높아진 밭쥐를 없앨까 수없이 고민하다가도 '우리 여우' 때문에 이 모든 걸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여우라면 문이 열렸을 때 달아났을 텐데, 그 여우는 자신을 그의 영역에 속하게 해줬습니다. 캐서린 레이븐의 이야기가 인상 깊은 건 여우를 자신의 친구로 삼는다는 인간 중심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겁니다.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지만, 그의 여우는 자신을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언제나 그 여우가 중심입니다. 그가 자신을 가능한 범위만큼 허락해 준 셈입니다. 그건 오두막 주변 곳곳에 오줌을 누어 자신의 영역으로 표시한 여우의 행동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시속 15킬로미터의 바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여우를 위해 도랑을 치우고, 개와 들고양이를 쫓아내고, 회전초를 청소하는 저자. 그 대가로 여우는 풀밭을 누비며 설치류를 괴롭히고 멋진 묘기를 보여줍니다.
"우리 여우는 언제나 스케줄을 정확히 지켰다."라고 할 정도로 여우와의 관계는 무르익습니다. 그러다 4시 15분에 나타나지 않으면 왠지 뒤숭숭해집니다. 여우를 걱정하는 모습조차 냉철한 과학자의 모습이 아닌 친구를 걱정하는 모습입니다. 객관화하고 연구 대상으로 삼는 대신, 나머지 여우와는 다른 '우리 여우'로서 대했습니다. '우리 여우'는 친구이지만 나머지는 이웃인 겁니다. 『어린 왕자』를 읽을 때 한 문장이 끝나면 꼭 15초 간의 침묵이 이어집니다. 여우가 말할 차례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눈빛을 교환합니다.
행동과 시선으로, 언어 없이 맥락만으로 소통을 한 여우 덕분에 현대인이 가진 불안함과 긴장을 풀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캐서린 레이븐의 삶은 『모비딕』의 육지판 이슈메일의 삶을 닮았습니다. 자연은 그를 성장시킵니다. 고독을 소중히 하면서 야생의 힘에 경이로워하고, 그로 인해 상상력이 깨어나고 팩트만을 중요시하는 현실주의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우리 여우'는 그에게 또 다른 세상을 선사했고요.
가끔씩 말대답하듯 '꽈아' 소리를 내뱉는 '우리 여우'를 상상해 봅니다. 보은이랍시고 밭쥐를 물고 오는 여우의 모습에 엄마 미소가 절로 납니다. 헨리 소로의 『월든』처럼 자연 속 생생한 야성의 감성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반길만한 야생동물과의 마법과도 같은 우정 이야기 <여우와 나>.
전형적이지 않은 여우와 전형적이지 않은 인간이 만나 눈을 맞춘 시간들. 그 시간엔 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와의 연결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우리 여우'는 캐서린 레이븐에게 '여우들'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도피처가 아닌 근거지로서의 오두막이 되도록 했습니다. 여우가 남긴 유산으로 살아가는 그의 행보에 응원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