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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웬디 미첼 지음, 조진경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10월
평점 :

치매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치매를 앓는 사람, 치매 환자를 돌보는 사람을 위한 책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치매가 있어도 좋은 삶은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웁니다.2014년 58세에 조기 발병 치매 진단받은 저자는 20년간 영국국민의료보험에서 일했지만 사회나 병원 모두 치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치매활동가로 살게 됩니다. 저자가 치매 환자를 대표하진 않지만, 간병인 없이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8년여를 살아가고 있는 치매와 함께 사는 삶에 대한 솔직한 기록을 담았습니다.
나이프 대신 숟가락, 찻잔은 머그잔으로 바꾸어야 하는 생활. 치매 진단 이후 그의 일상은 많은 변화를 겪습니다. 하얀 접시에 색이 흐릿한 음식을 주면 치매 환자는 접시에 음식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맛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양손이 더 이상 협력하지 않기 때문에 고기를 자르는 일도 힘들어집니다. 고기를 씹을 때 얼마나 오래 씹었는지 얼마나 더 씹어야 하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뜨거운 음식도 인지하지 못해 입안에 알게 모르게 화상 자국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면 그저 치매 환자는 까다로운 사람이라 판단해버리고,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 채 서로 힘들어집니다. 패턴 있는 카펫은 방향 감각을 상실해 넘어지지 않으려 바닥을 보느라 시간을 낭비합니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은 수영장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검은색 매트는 싱크홀처럼 느껴집니다. 카펫과 벽의 색이 같으면 걸어 다니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이런 감각 왜곡에 대한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저도 이 책을 읽고서야 치매의 증상이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을 앗아가는 정도로만 알고 있던 치매는 이렇게 일상의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오감에 대한 왜곡이 심해집니다. 우리는 뇌 안에서 복잡한 질병이 생기고서야 비로소 일상의 잡다한 일들이 실제로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인지 기능, 감각 경험, 운동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치매를 진단받은 저자는 부끄러워하기보다 대처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펜을 불 위에 올리는 요리보다 데워먹는 간편식 위주로 음식을 먹고, 모든 생활에서 알람은 필수로 설정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식사 시간을 알지 못하고, 얼마나 걸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감각에 대해 환각을 보이는 증상이 나타나면 저자는 30분 테스트를 하기도 합니다. 자리를 떠났다가 30분 후에도 그대로면 환각이 아니라는 (이런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거라는걸요. 환자가 무슨 냄새가 난다고 하면 그 순간 그에게는 정말 그 냄새가 존재한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치매 환자와 간병인 간의 관계 맺음이 원활해집니다.
문제는 이런 왜곡 감각에 대해 전문가들은 아무도 경고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감각의 변화는 질병 자체가 아니라 환자 개개인의 문제이기에 치매와 감각 변화의 관계를 연구하는 게 아직 부족한 현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해결책을 결국 다 마련합니다. 치매 의사도 도움을 주지 못했던 청각 과민증을 겪을 땐 특정 범위의 소음을 차단하는 보청기를 마련했습니다. 훨씬 나은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치매 환자와 친환경적인 공간으로 구성하느라 눈에 잘 띄는 노란색 테이프를 붙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두 딸을 키운 싱글맘으로 가족 간병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는 가족 간병인. 환자마다 기능 감퇴 속도가 달라 예측 불가능한 진행성 질병을 안고 새로운 미래를 헤쳐나가야 하는 치매 환자와 간병 문제에서 치매 환자들에 대한 사후 관리의 부재를 몸소 경험합니다. 공공 부분이 맡아야 할 일을 자발적 조직에 의존하게 하는 실상을 짚어줍니다.
그럼에도 각자의 삶을 영위하길 바랐고, 어떤 방식으로든 항상 엄마이고 싶었다는 저자의 솔직한 마음은 쓸모 있음에 대한 존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혼자 생활하면서 마주하는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을 계속 찾아 나선 겁니다. 그리고 이 결심이 오히려 매일 치매를 이겨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환자의 회복력을 키우고 앞으로도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는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실제로 그럴 수 있게 해주는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치매 친환경적인 지역 사회처럼 말입니다.
치매 활동가로 사는 그를 섣불리 판단하며 비판하기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는 그 행사장에 방금 등장했다 싶지만, 실제로는 몇 주 전부터 경로를 짜고, 가는 길에 지나갈 수 있는 랜드마크 이미지를 인쇄하는 등 준비하는 데만 무척 큰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이 책이 치매 환자가 쓴 기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만큼 치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겁니다.
여러분은 치매 환자를 떠올릴 때 어떤 이미지인가요. 치매를 보는 인식은 대부분 노망, 정신 착란, 짐, 산송장 같은 이미지 아니던가요. 육신만 남은 겉껍데기라는 이미지로 사회적 낙인을 찍는 치매입니다. 그렇기에 치매 친환경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건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겁니다. 치매의 전통적인 경로를 따르지 않는 경우, 전문가들조차 진단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정도로 치매 환자에 대해 모른다고 짚어줍니다.
치매 병원조차 건물이 엉망입니다. 옅은 색 배경에 은색으로 박힌 표지판처럼 애초에 디자인 단계부터 치매 환자들이 참여한다면 훨씬 더 나은 환경을 만들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중증 치매 환자들이 이용하는 치매 마을의 부자연스러움에 대해서도 들려줍니다. 저자는 소셜미디어 활동도 하고, 줌 모임도 가집니다. 어린이용 사이트처럼 직관적인 사이트면 인터넷 활동도 가능합니다. 공공 좌석, 화장실 시설, 떨어진 연석, 건물 경사로, 적절한 도로 표시, 보행자 횡단보도 신호 시간 등 노인 친화적으로 만드는 실질적인 사항들을 들려줍니다. 네덜란드에는 230여 개 이상의 치매 카페가 있습니다. 대만은 치매 친화적 상점들이 있습니다. 중국은 GPS 추적 장치가 내장된 노란 팔찌 프로젝트를 시행합니다. 노르웨이의 전통 농장을 개방한 그린 케어 모델의 유용성도 알려줍니다.
"치매 진단을 받은 이후에도 내 감정은 여전히 존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나는 안다. " - 책 속에서
저자 이외에도 치매 진단 2년 차, 8년 차... 진단 이후에도 여전히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치매의 부정적 선입관을 깨뜨리게 해주는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미화하지도 않고 병의 진행 추이에 따른 감정들을 진실하게 기록하며 변화한 세상을 받아들이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유독 상태가 나쁜 날도 있습니다. 진행성 질병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진단받기 전의 나와는 다릅니다. 치매는 분명 사람을 황폐화시킵니다. 하지만 최후를 재촉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압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아주 멀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스카이다이빙을 하느라 담당 의사의 서명을 받아낸 저자는 멋지게 스카이다이빙을 해냈습니다. 남이 보면 엉뚱해 보일지 몰라도 언제나 지금 여기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치매를 활용할 줄 아는, 오늘을 살아가는 저자입니다.
치매 같은 질병에 관해서는 태도가 싸움의 절반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영향도 크게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의 변화는 치매 환자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부터 시작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