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우울의 말들 - 그리고 기록들
에바 메이어르 지음, 김정은 옮김 / 까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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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함, 공포, 슬픔과는 다른 현실의 상실과 짝을 이루는 우울증에 대한 고찰 <부서진 우울의 말들>. 네덜란드 철학자이자 작가 에바 메이어르는 열네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겪은 우울증을 고백하며, 자신만의 문법으로 우울증과 함께하는 삶을 묘사합니다. 


‘모든 색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결국에는 색의 기억만 남기고 회색으로 변해버리는’ 우울증을 이겨내는 극복기가 아닙니다. 그저 우울증의 어둠이 더 커지거나 더 줄어들거나 할 뿐 사라지진 않는다는 것을... 결국 우울증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로 인해 위안, 희망,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여전히 세상에 속해 있고 여전히 나 자신인데도, 우울증은 나와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고 주인공 로캉댕의 무덤덤함에 공감할 만큼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이 회색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는 에바 메이어르. 


청소년기에는 그저 반항으로 표출하며 스스로 고립시키기도 했다고 고백합니다. 자살에 대한 생각도 함께 따라다녔지만, 이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은 접게 됩니다. 자살은 해결책이 아니라 끝이라는 걸 깨달으며 대신 그는 오히려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우울증에 대처하는 법을 고민한 겁니다. 마침내 에바를 구원한 것은, 다른 어딘가에서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울증 치유와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주어진 뭔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선택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나는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해주는 일상을 나 자신에게 가르쳤다." - 책 속에서


우울한 사람의 뇌는 노화 질환에 취약하다고 합니다. 기억력을 담당하는 해마의 크기도 줄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에바는 우울증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하는 과정도 경험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더 잘 이해하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불안과 슬픔은 종종 감정의 과잉을 일으키지만, 우울증은 모든 것을 공허하게 만들고 부정적인 감정의 고삐를 풀어놓는다고 합니다. 우울하면 모든 것이 부질없어 보입니다. 만약 우울에 색깔이 있다면, 회색이거나 때로는 침묵의 흰색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우울증을 이해할수록 우울증과의 싸움이 아니라 우연의 문제임을 깨닫습니다. 내면의 우울의 바다가 수위를 조절할 뿐이라는 것을요. 누워버리면 물에 잠기게 될 테니, 그러지 않도록 뭔가 대체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울증을 앓는 동안, 내 몸속에는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 책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우울증을 앓다 보니 에바는 우울증 이전의 자신이 어땠는지 모르고, 우울증이 없었다면 어땠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우울증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우울증에 민감한 사람으로 인정하며 성장합니다. 


치료법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열네 살 때부터 청소년기에는 다양한 치료사들과 대화 치료를 했고, 이후엔 항우울제를 처방받기도 합니다. 섭식 장애를 앓으며 치료소에 입원해 다양한 인지 치료, 행동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우울증 약을 중단했을 때 6주 동안 속이 메스꺼웠던 이후 규칙적인 일상을 엄격하게 지켜오게 됩니다. 에바에게는 항우울제보다 더 효과가 좋았던 건 하루 두 시간 반려견들과 산책하고, 매일 한 시간씩 달리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행동 치료에서 중요시하는 습관 관리와도 맞물립니다. 


모든 것이 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기분은 여전합니다. 몇 달 후에도 안개는 걷히지 않고, 무기력은 더 무겁게 짓누르지만 그럼에도 계속 걷습니다. 예전에 그랬듯이 결국 지나갈 것이고, 지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에서 단순히 견디는 것으로 초점을 바꾸고, 불쑥 들이닥치는 공허함을 자신만의 대처법으로 견뎌내고 있습니다. 에바의 이력이 철학자, 작가뿐만 아니라 화가, 가수 겸 작곡가 등 예술, 문학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걷기, 글쓰기, 작곡하기, 명상하기 등 자신만의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우울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의연해지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한 내 운명을 세상과 연결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자크 데리다, 하이데거, 세네카, 비트겐슈타인 등 철학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프란츠 카프카, 버지니아 울프, 페르난두 페소아 등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우울증에 대한 고찰을 곁들여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여정을 보여주는 <부서진 우울의 말들>. 


이 책은 우울증의 경험을 이해하고 치료하기 위한 현상학적 통찰을 건네기도 하면서 더불어 우울한 사람과 가깝게 지내야 하는 사람을 위한 교훈도 알려주는 책입니다. 에바 메이어르의 문법은 우울증을 묘사하는 데 있어 상투적이지 않으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묘사한 멋진 책입니다. 삶과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지는 방식을 이야기한 <부서진 우울의 말들>. 잘 견딜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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