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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Last 이제야 흉터가 말했다
리퍼 지음, 가시눈 그림 / 투영체 / 2021년 12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921/pimg_7960121633565499.jpg)
양질의 그래픽노블을 만나고 싶을 때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추천 작품은 언제나 성공적입니다. 2018년 다양성만화지원사업 선정작 <At Last 이제야 흉터가 말했다>. 기록기와 치유기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성폭력의 일상성과 개인의 치유 과정을 기록한 리퍼 작가와 가시같은 눈으로 예술이란 바늘을 들어 감정의 심장을 찌르는 자라는 의미를 담은 가시눈 작가의 그림으로 탄생한 그래픽노블입니다.
친척 오빠로부터 결혼 소식을 받은 날, 어린 날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는 주인공 '이제야'. 어린 시절 친척 오빠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주인공은 기이한 감정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친척 오빠 한 명만이 아니었습니다. 유치원 시절 이웃집 대학생으로부터,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유행처럼 번지며 못된 행동을 하던 학교 남자아이로부터, 등굣길 버스 안 치한으로부터...
당시엔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뭐가 잘못된 건지 인지하지 못하던 시기엔 그저 비밀처럼 입을 다물고 있기만 했고, 친척 오빠의 미안 한 마디에 그냥 넘어가기도 했고, 어떤 땐 엄마에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그를 더욱더 자책감과 죄책감에 빠지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너는 잘못이 없어."라는 마법의 말을 엄마로부터 듣기까지 했는데도 말입니다. 몇 달 후 엄마가 가해자의 엄마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날, 엄마는 정말 다 잊을 수 있는 걸까라며 충격받는 장면에선 저도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 일들은 일상을 좀먹는 벌레처럼 자리 잡습니다. 악몽을 꾸고 우울증에 빠지고 연애와 결혼관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남성들이 호의를 가지고 접근할 때조차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이성적 접근 자체가 혼란스러워진 겁니다. "오빠 좋아하니?"라는 말도 그루밍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에게서 몸을 혼자 씻는 법을 배우던 날, 다른 사람이 만지면 큰일 난다는 말을 한 엄마에게 어떤 큰일이 나느냐고 기필코 대답을 받아내는 '이제야'. 이 장면에서 가정 성교육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자 인생은 그걸로 뒈지는 거라는 엄마의 대답. 이미 비밀이 있었던 '이제야'에게는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치명타였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고, 아니면 잊히기라도 했으면 한다는 처절한 고백. 그저 묻어뒀을 뿐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입니다. 상실감, 무력감을 안긴 여러 사건들은 그렇게 비밀을 계속 지켜야 하는 아이로 살게 만듭니다.
방어적인 태도는 일상 곳곳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평범한 여성으로 보이길 바라는 마음도 가졌습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흉터의 기록기를 쓰면서 그동안 떠올리는 것을 금기시했던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렇게 용서해버린 스스로를 혐오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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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쁜 기억들을 떠올리며 하나씩 개별 사건들을 인지하게 됩니다. <At Last 이제야 흉터가 말했다> 치유기 편에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여정을 만나게 됩니다. 심리 상담도 해봤습니다. 첫 심리 상담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평생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던 그를 자극하는 계기가 됩니다. 나쁜 기억들을 기억의 잔으로 표현한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기억의 뇌라는 컵에 상담이라는 빨대를 휘휘 저으니 나쁜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다시 가라앉는 걸 기다려보지만, 평정심을 찾을 때까지의 시간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매번 흉터가 찾아와 책망하고 비난했던 시간들. 나쁜 경험을 말하고 그 감정을 이해받는 경험이 없었던 '이제야'는 비로소 감정의 억압을 터트려 풀어주는 경험을 알게 됩니다. 더 이상 그 일이 인생을 휘두르게 둬선 안된다는 생각에 성폭력 피해자들의 자조 모임에도 나가봅니다. 이곳에서 피해자다운 반응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성폭력에 대해 공부도 시작하고, 미투 관련 다큐에도 참여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공개적으로 꺼내기로 결심합니다.
슬프고 화나는 일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다행히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며 묘한 안심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기억 저 너머로 숨겨뒀던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야' 역시 지독한 그림자를 쉬 없앨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흉터를 무시하고 침묵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마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신당동 스토커 살인 사건처럼 여전히 이 세상은 도움을 청한 여성의 목소리를 무심하게 듣습니다. 우리 사회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림책에서는 엄마에게 말하면 다 해결된다고 나오지만, '이제야'는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작가는 정작 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대처를 알고 있기는 한 건지 묻습니다. 그리고 그게 엄마의 책임이기만 한건지도 묻습니다. 그저 일부 개인의 경험일 뿐이라며 무관심한 시선을 두지 않길 바라는 리퍼 작가의 마음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남자가 여성의 성폭력 경험을 듣고 "맘이 아프다"라며 깊은 공감을 하는 에피소드처럼 마음의 흉터를 더 나누며 대화를 해야 하는 세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었던 이들에게는 연대의 힘이 어떻게 흉터를 가진 이들에게 스며들면서 삶의 회복으로 작용하는지 생생하게 바라보게 될 겁니다.
때로는 은유적이지만 소름 끼치는 그림으로 충격을 안기고, 때로는 귀여운 그림으로 연민의 정을 안기며 리퍼 작가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가시눈 작가의 매력적인 그림이 인상 깊은 그래픽노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