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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 - 보모 사진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현상하다
앤 마크스 지음, 김소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8월
평점 :
무명 사진작가에서 20세기 최고의 거리 사진작가로 이름을 올린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 1926~2009). 비비안 마이어를 우리가 알게 된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2007년 시카고 경매장을 찾은 존 말루프와 제프리 골드스타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비비안 마이어의 존재를 여전히 알지 못했을 겁니다.
수많은 네거티브 필름과 현상하지 않은 필름 14만 점이 고스란히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고, 대단한 물건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한 두 수집가의 노력으로 사진작가의 행방을 알아냈을 땐 이미 고인이 된 후였습니다.
존 말루프가 플리커에 스무 장의 사진을 공개하자마자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비비안 마이어 밈이 형성될 정도로 화제를 모읍니다. 그런데 비비안 마이어를 조사할수록 오히려 미스터리한 인물이 되어갑니다. 비비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극과 극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권위적인/소극적인, 배려하는/냉담한, 여성적인/남성적인, 쾌활한/냉소적인, 열정적인/둔감한, 사교적인/비사교적인, 눈에 띄는/은둔하는, 메리 포핀스/사악한 마녀... 어떻게 한 인물에 대해 이토록 상반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걸까요.
이 여정은 2015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인상 깊게 본 앤 마크스 저자는 비비안 마이어 아카이브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허락받아 보모 사진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추적하게 됩니다. 가족조차 찾지 못한 비비안의 가계도를 작성해 내고, 생전에 교류한 사람들을 찾으며 6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비비안의 일상과 관심, 세상을 보는 시각을 알아내야 했습니다. 그저 사진 작품집이 아니라 비비안의 전 생애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게 탄생한 전기 <비비안 마이어>. 비비안 마이어는 누구이며, 사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이 책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마지막 자화상 사진을 포함한 400여 점의 사진과 함께 비비안 마이어의 삶을 따라가봅니다.
2022년 11월 13일까지 국내에서 열리는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에서는 역대 최대 규모인 270여 점의 사진과 자료가 선보이는데, 비비안 마이어의 트레이드마크인 1:1 정방형 사진이 그야말로 예술이더라고요. 6×6cm 포커싱 스크린의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입니다. 허리 부근에서 카메라를 잡아 사진 찍는 사람의 얼굴을 가리지 않는 롤라이플렉스는 아래에서 위로 찍어 피사체를 돋보이게 하는 기술을 쓴 비비안 마이어의 영감과 재능을 살린 카메라입니다.
비비안의 사진 속 인물들은 나이, 인종, 성별 불문하고 피사체가 생동감 있게 다가옵니다. 도시 풍경, 건축물, 평범한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 가판대, 자화상 사진, 거리... 다양한 장르를 탐구했던 비비안입니다. 살바도르 달리, 오드리 헵번 등의 사진을 뜻밖에 마주하는 즐거움도 얻을 수 있습니다. 전업 사진작가가 아닌데도 이처럼 사진을 찍으려면 수시로 사진을 찍으러 나갈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비비안 마이어는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로 생활비를 벌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학위도 인맥도 없이 홀로 배운 사진작가는 재능이 있었더라도 힘든 일을 많이 겪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손놓지 않고 카메라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불안정하고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어머니, 폭력적인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마약에 중독되고 조현병을 앓은 오빠. 이런 과거를 숨기고 독립적으로 살아나가기로 결정한 비비안은 입을 다물고 멀리 떨어지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보모로서는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생각 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겐스버그 가족의 집에 고용되어 11년간 세 아이의 보모로 지낼 때는 가장 오랫동안 안정적인 생활을 누립니다. 어린 시절의 해독제가 되어준 가족을 만난 겁니다. 이때 언제나 목에 카메라를 매단 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고, 자화상 사진 기술이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안정적인 삶은 형제들이 성장하며 끝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비비안의 저장 장애가 심해지고 내면이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사진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정서적 유대감을 원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깨닫지 못한 채 냉담하게 떠난 비비안. 그렇게 감정적으로 좋은 이별을 스스로 해내지 못한 비비안은 추진력과 창의력을 잃으며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불행한 어린 시절에 대한 통제감을 얻기 위한 저장 장애는 악화되었고, 감정의 깊은 공허감을 물건으로 채우게 됩니다. 신문, 잡지 등을 강박적으로 모으며 그것들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대여하기에 이릅니다. 사진 역시 타인과 공유하는 일이 점점 불가능해졌으니 꾸준히 찍었음에도 현상하지 않은 필름 상태 그대로 보관만 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울모드로 인생이 끝나나 싶을 테지만 비비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보모 일이나 노인 돌봄 일을 하면서 이제는 라이카로 컬러 사진을 찍으며 비비안의 자화상은 다시 한번 생기를 얻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비안이 스스로 소소한 일상 기록물들을 찍은 사진을 보면 지금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는 듯합니다. 가지런히 배치하고 소품과 장식을 더해 찍은 사진을 보고 한참 웃었습니다.
40년 동안 사진에 열정을 바친 비비안 마이어. 말년에 도움을 준 겐스버그 형제들을 보면 비록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비비안의 삶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엉망이었던 건 아니라는 걸 엿볼 수 있습니다. 독립적이고 자존심 강한 비비안의 모습을 누군가는 냉담한 성격의 이상한 사람이란 편견을 가지고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비안의 삶을 알아갈수록 실패자, 낙오자가 아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애쓴 비비안의 투쟁을 곳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에서 자화상 사진을 보며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당시 비비안의 마음을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됩니다. 세상에 자신을 집어넣는 행위로서의 자화상 사진은 그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세상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촉진제였던 겁니다. 비비안 마이어 신화를 다시 써 내려간 전기 <비비안 마이어>. 슬픈 인생을 살다 간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내려고 노력한 예술가 비비안 마이어. 20세기 거리 사진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한 비비안의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