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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태어나서 - 자칭 리얼 엠씨 부캐 죽이기 ㅣ 고블 씬 북 시리즈
류연웅 지음 / 고블 / 2022년 6월
평점 :
가볍고 얇은 판형으로 짧지만 단단하고 강고한 이야기들을 담은 고블 씬 북 시리즈. 이번엔 극작가로 활동하며 다크와 블랙을 추구하는 작가 류연웅의 <한국에서 태어나서>로 새로운 블랙코미디 장르를 만나봅니다.
힙합 음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무대로 써 내려간 소설입니다. 마니아적 요소가 다분한 힙합이라는 소재를 통해 꿈과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펼쳐 보입니다. 릴뚝배기와 조헤드라는 이름을 쓰는 래퍼. 두 주인공의 사건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흐름 속에서 타임리프까지 등장하는 특이한 구조입니다.
릴뚝배기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힙합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인지를 쌓아올리며 스물일곱 살에 드디어 1집을 발매하지만, 한방 빵 터지는 일 따위는 없었습니다. 댓글이라곤 "얘는 미국에서 태어났어야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댓글도 한 개밖에 없네;;"뿐입니다. 미래가 보이질 않은 상황. 이제는 그만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순간 그에게 신이 찾아옵니다. "넌 이제 뒤졌다." 하면서 말이죠. 아뿔싸. 오래전 "제가 만약 힙합을 버리려고 한다면… 가차 없이 저를 뒤지게 해주세요."라고 했던 기도가 기필코 이뤄지다니요.
한편 힙합 오디션에 참가해 1등을 하고 대형 기획사와 방송국 도움을 받으며 한방 제대로 터뜨린 일명 잘나가는 조헤드의 상황도 꼬여버렸습니다. SNS 비밀 계정에 업로드한 줄 알았던 글이 공식 계정에 올라가면서 난리가 나버린 겁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ㅈ 같다."라는 글이었거든요. 소속사에서 이 위기의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전략을 구상합니다. 노이즈 마케팅으로 말이죠. 언더그라운드 시절의 정체성을 죽이고 진정한 조헤드로 탄생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일종의 부캐 죽이기에 나섭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의 부제 '자칭 리얼 엠씨의 부캐 죽이기'에 돌입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는 조헤드와 릴뚝배기의 교차점을 발견합니다. 조헤드의 아마추어 시절 예명이 릴뚝배기라는 점입니다. 성공하지 못한 릴뚝배기의 자아로 진행하는 시점과 성공한 조헤드의 자아로 진행하는 시점이 얽히며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꿈을 가진 릴뚝배기와 조헤드가 어느새 부질없다며 한탄하는 상황은 그야말로 삶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릴뚝배기는 대형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발을 들인 아티스트들을 가짜로 규정해야만 버틸 수 있었습니다. 릴뚝배기는 오디션 참가용 예명인 조헤드를 결국 사용하지 않았으니까요. 반면 산업 아티스트가 된 조헤드 역시 나름대로의 고충을 안고 있습니다. 성공하고 나니 배불렀다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온갖 합리화로 살아왔지만 허탈감이 밀려옵니다.
릴뚝배기에게 마지막 하루를 살아갈 기회를 주고 신은 쿨하게 퇴장하고, 릴뚝배기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 시간을 마지막 기회로 삼기로 합니다. 조헤드도 과거를 정리하고 새롭게 탄생하려고 발돋움을 합니다. 릴뚝배기와 조헤드 각자의 청산은 어떻게 진행되고 그로 인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기대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입니다.
힙합이라는 소재로 진행하지만 이 소설은 꿈을 향해 달리는 청춘들의 내적 갈등을 보여줍니다. 그 과정에서 타협하고 합리화한 시간들의 대부분은 결국 스스로를 속여왔던 시간들이 아니었나 생각하기에 이른 릴뚝배기와 조헤드의 모습은 남 일 같지 않습니다. 버리고 싶은 과거의 자신조차 지금의 나에 이르게 한 정체성의 일부라는 걸 마음 깊이 알고는 있으니까요. <한국에서 태어나서>는 저마다 다른 상황에 처했지만 자신의 무능과 약함에 슬퍼했던 청춘들이 이제는 도망치는 대신 그 슬픔을 이해하려고 하는 성장 드라마입니다.
류연웅 작가의 작품은 <펄프픽션>에서 단편 『떡볶이 세계화 본부』로 처음 만났었는데요. 불공정과 불평등을 떡볶이를 소재로 기발하게 풀어낸 것처럼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들의 갈등과 고통을 뜻밖의 소재로 이야기하는 재주가 좋은 작가여서 다음 작품도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