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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보다 - 불안을 다스리고 진정한 나를 만나는 침묵의 순간들
마크 C. 테일러 지음, 임상훈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2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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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침묵 없이 사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소음은 청각적일 뿐만 아니라 시각적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음성과 이미지는 우리의 감각을 공격하며 우리의 삶 깊숙이 침투해있습니다. 소음에 빠져 벗어나지 못한 채 소음에 중독된 우리에게 침묵을 이야기하는 책 <침묵을 보다>.
종교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마크 C. 테일러 저자는 철학자, 문학가, 예술가, 작가 등의 작업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침묵을 분석해나갑니다. 침묵하는 법 같은 자기계발 성격이 아니어서 쉬운 책은 아니었습니다. 침묵의 의미를 이토록 집요하고 폭넓게 파헤치는 저자의 역량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저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가진듯한 독창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어 명쾌한 이해보다는 알쏭달쏭하면서도 어느 순간 매료되는 낯선 경험을 안겨주는 책입니다.
침묵은 그저 소음 없음의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주체를 적극적으로 나에게 맞춰본다면, 자신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하는 것과 같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에 침묵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침묵을 듣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침묵을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주변의 침묵보다 더한 침묵이 되어야 침묵이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고 한 에드몽 야베스처럼 침묵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침묵을 보다>는 부모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집을 정리하다 발견한 오래된 사진 박스에는 도무지 누군지 알 수 없는 오래된 사람들이 찍힌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과거를 살펴보며 침묵 속에서 며칠을 보냅니다. 그 사진들을 보며 침묵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한때는 기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과거의 침묵뿐 아니라, 침묵 너머의 침묵을 마주한 겁니다. 침묵을 듣는다는 것은 당신이 없는 세상을 듣는다는 것과 같다는 걸 알게 됩니다.
도시의 침묵은 시골의 침묵과 다르고, 시작의 침묵은 끝의 침묵과 같지 않으며, 젊음의 침묵은 노인의 침묵과 같지 않듯 이런 다양한 형태의 침묵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새로운 말(세계)을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침묵과 언어와의 관계를 깊게 파고든 하이데거,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 등 여러 철학자들이 정의 내린 침묵을 찾아 나섭니다. 수전 손택은 <침묵의 미학>에서 침묵을 충만함과 텅빔이라는 양면적인 성질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침묵이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말하지 않는 것도 있는 반면 말할 수 없는 것도 침묵의 형태로 나타나니까요.
1952년에 첫 공연한 존 케이지의 유명한 작품 <4분 33초>는 연주시간 동안 아무런 연주를 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완벽히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무향실에서 절대적인 무음이 아닌, 자신의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은 경험 이후 침묵의 의미를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됩니다. 2012년에 열린 메닐 재단의 <침묵> 전시는 여러 예술가들이 해석한 침묵 작품들이 전시되었습니다. 시각예술이 침묵의 소리를 탐구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짚어줍니다.
침묵을 지키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있지만 말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도 있을 테고 말이죠. 역설적으로 침묵을 지킴으로써 오히려 말을 하는 셈입니다. 말과 침묵을 그저 반대로만 볼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자살은 최후의 침묵을 자신에게 강요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침묵에 몰두하며 결국 자살한 마크 로스코의 이야기를 통해 침묵의 공간을 찾아 헤맨 그의 삶을 이해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읽은 <컬러애 빠지다>를 통해 반타블랙에 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는데요. 거의 모든 빛을 반사하지 않고 흡수하는 절대 검정인 반타 블랙. 블랙홀 같은 느낌도 들고, 입체감 없이 평면으로 보이게 할 정도인 반타블랙의 사용 독점권을 확보한 예술가 카푸어의 작품을 통해 심연의 어둠과 같은 침묵을 해석해 보기도 합니다.
시끄러운 세상에서 침묵은 오히려 사치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음 공해를 차단하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이 탄생될 만큼 침묵의 상업화에 이른 수준이 되었습니다. 침묵은 두 눈을 감아야만 듣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소음을 다 눌렀을 때 남는 게 침묵이 아니라고 한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처럼 침묵을 새롭게 바라보는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책 구성도 침묵의 공백을 넣어 흥미진진하게 표현했습니다. 아무런 내용 없이 … 만 표기된 채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제임스 터렐, 바넷 뉴먼, 애드 라인하르트, 마크 로스코, 애니쉬 카푸어, 마이클 하이저, 도날드 저드, 로버트 어윈, 엘스워스 켈리, 안도 타다오 등과 함께 하는 침묵의 시각 예술을 만나는 시간 <침묵을 보다>. 예술을 통해 철학적인 침묵의 세계를 탐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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