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다
최다혜 지음 / 씨네21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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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손 벌리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있는 돈이 모이면 내 작업을 하려 했던 일러스트레이트 김지현 씨, 논문에 몰두하지 못할 만큼 지원 없이 혼자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 대학 시간 강사 강은영 씨, 돈도 없으면서 계속 그림을 그리는 게 맞는지 자괴감이 드는 무명작가 이지은 씨.


<아무렇지 않다>는 프리랜서, 비정규직, 예술인으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평범한 일상에 문득문득 찾아오는 좌절과 무기력함. 수많은 갈등 속에서도 어떻게든 하루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담담한 발자국은 공감과 위로, 연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저 매일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이 한 톨이라도 남아 있다면, 무너지는 날에도 그저 계속 매일을 이어가는 세 여성. 이들의 이야기는 5년간 시간 강사로 일했고, 10년 넘게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한 최다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이 시대 비정규직 프리랜서 예술인 저마다의 이야기입니다.


"불행은 늘 초대 없이 무례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세상은 불행을 겪는 이들에게 그것이 그들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 말하는 더 큰 무례를 범한다." - 책 속에서


책 표지에 글, 그림 누구누구 할 때의 그 그림에 이름이 나오는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김지현 씨. 언제나 '을'로 외주 작업을 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의 고충을 담아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계약서 수정을 원하면 다른 작가들은 믿고 하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까탈스럽냐는 무례함이 깔린 거절을 받습니다. <아무렇지 않다>를 읽으며 나의 배려가 타인에게 큰 상처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글 작가로부터 '제 책에 들어갈 그림'에 대한 감사 선물을 받을 때처럼 말입니다. 표지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인데도 정작 이름 한 줄 표지에서 찾아보기 힘들 때도 허다합니다.


노는 것도 아닌데 학자금에 월세에 돈 나가는 일은 수두룩하고 정작 논문 쓸 시간과 에너지조차 없는 대학 시간강사 강은영 씨. 이상만을 바라보며 현실을 회피하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다 잘나가고 있는 것 같아 비교하게 되고, 대학에서 강의하면 다 교수 아니나며 추켜세우는 말에도 자괴감이 듭니다. 우리의 삶이 예술이라고 말한다면 "정말 삶이 예술이라면 (중략) 우리 스스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한다는 강의 때 한 말은 자신에게 다짐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을까요.


물감 하나 사는 것도 주저하게 되고,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울 때도 저렴한 것만 고르게 되는 가난한 예술가 이지은 씨. 미술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해도 돈이 안되는 애매한 수상 실력이지만, 그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게 사람 사는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알바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없어집니다. 사람이 무너지는 건 큰 사건이 일어나야만 하는 게 아니라 간신히 잠재워둔 불행을 건드릴 때입니다. 아무렇지 않은 말 한마디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이지은 씨의 막막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글 없는 그림들이 인상 깊습니다.


회화는 천사나 비너스가 아닌 현실 속 우리 주위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걸 표현한 귀스타브 쿠르베의 작품 『화가의 작업실』 만큼이나 현실의 이야기를 들려준 그래픽 노블 <아무렇지 않다>. 추한 모습일지라도 작품으로 표현해 내야 한다는 쿠르베의 이상이 최다혜 작가의 글과 그림에서 엿보입니다.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닙니다. 의도가 악의적이지 않다고 해서 상처를 받은 사실이 사라지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나는 그들이 그저 살아가기만을 바랐다."며 불행에 지친 지현, 은영, 지은이 어떤 형태로든 삶을 이어가길 바라는 작가의 바람이 담겼습니다. 뻔한 성공 스토리나 입바른 위로 따위는 없습니다. 그저 불행에 맞설 힘 없이 체화한 이들에게 건네는 담담한 연민의 시선과 공감, 연대의 힘이 오늘도 한 발자국 나아갈 힘을 준다는 걸 그려낸 극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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