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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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세 번째 여자 랍비이자 철학자 델핀 오르빌뢰르가 쓴 애도의 방식 <당신이 살았던 날들>. 프랑스 전국 봉쇄 조치 시기에 받은 한 통의 전화. 묘지에서 조문객 한 명 없이 부친의 관 앞에 서 있는 가족이 유대교의 기도를 알지 못해 도움을 청한 전화였습니다. 전화로 기도 말을 들려줬고, 그들은 그 말을 큰 소리로 반복하며 평생 처음으로 아파트 거실에서 한 가족을 위해 장례를 진행합니다.


랍비 Rabbi는 히브리어로 '나의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의례를 집행하고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델핀 오르빌뢰르 저자는 해가 갈수록 '이야기꾼'이 랍비의 역할에 딱 맞는 직업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삶의 전환점에서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들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장례를 진행할 때마다 우리 안에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죽은 자에게서 살아 있는 자에게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힘으로, 그 자리를 빛내고, 확장하려고 노력한다." - 책 속에서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서는 랍비로서 경험해야 했거나 함께할 수 있었던 삶과 애도들을 들려줍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인사도 있고, 친구나 일반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죽음을 이야기함으로써 삶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안겨주는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열한 가지 이야기들입니다.


히브리어로 묘지는 베트 아하임 Beit haH’ayim으로 불립니다. 역설적이게도 살아 있는 자들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양립할 수 없는 죽음과 삶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오르빌뢰르의 시도는 떠난 자와 남은 이들 사이의 공백을 메꿔줍니다.


프랑스 정신과의사 엘자 카야트. 2015년 1월 7일 「샤를리 에브도」 본사를 습격한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오르빌뢰르는 유대인 전통의 언어로 엘자의 삶을 불러냅니다. 탈무드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그녀를 침묵시킨 자들의 어리석음을 꼬집었습니다.


유족들을 만나고 장례를 준비하면서 유족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들려줄 수 있을지, 어떤 여운을 줘야 할지 고민하는 여정이 담겼습니다. 홀로코스트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쇼아' 생존자였던 이의 죽음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말해야 합니다. 여기서 모두는 동시대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고 먼 훗날 ' 이 일들'이 일어났었다는 의식을 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합니다.


쇼아 생존자였던 사라의 장례식에 홀로 온 아들. 그럼에도 오르빌뢰르는 그날 그 어느 때보다 더, 묘지에서의 임무를 잘 이해했다고 소회합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알려준 아들에게 다시 들려주었을 뿐이지만, 그의 입을 벗어난 이야기가 오르빌뢰르의 언어로 번역해 그의 귀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오르빌뢰르는 이 과정에서 사라처럼 쇼아의 생존자였지만 침묵을 선택하며 살았던 외할머니를 떠올립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 참석조차 할 수 없었던 아이들은 어른들의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 감히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애도와 연대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사라의 아들에게 연민과 공감을 느낍니다.


반면 프랑스 보건부 장관을 역임한 시몬 베유는 적극적으로 말하기를 선택했고, '다시 일어서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몸소 알려줬습니다. 시몬의 장례식에서 프랑스 최고 랍비와 함께 카디시 낭송을 한 오르빌뢰르. 정통파 유대인들 가운데 이 기도는 오로지 남성들만이 낭송할 수 있다는 편협한 시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베유법으로 여성해방의 기틀을 마련한 시몬의 장례식인데도 오르빌뢰르는 여자 랍비라는 이유로 카디시 낭송의 적법성 논란을 받았을 정도이니 시몬 베유의 투쟁 현안을 그의 무덤에서도 증명한 셈입니다.


거대한 상실의 시간이 된 팬데믹은 죽음이 늘 우리 삶의 피할 수 없는 종착지임을 되살립니다. 장례와 애도의 풍경이 바뀐 오늘날. 죽음이 야기하는 두려움과 고통은 만연해졌지만 결코 둔감해지지 않고, 불쑥 찾아온 빈자리를 우리는 어떻게 애도하고 위로해야 할지 당혹스럽습니다.


이런 시기에 필요한 이야기의 힘을 전달하는 <당신이 살았던 날들>. 애도 의식은 고인과 함께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남겨진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더더욱 존재하는 것이라는 걸 일깨웁니다. 의례는 애도자들이 살아남음의 시련을 헤쳐나갈 수 있게 도와줘야 하기에 오르빌뢰르는 살아있는 자들의 투쟁과 연대에 초점을 맞춥니다. 죽은 자의 이야기가 계승되어 죽음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을 읽고나면 내가 남길 이야기를 위해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숙연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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