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 - 시베리아 숲의 호랑이, 꼬리와 나눈 생명과 우정의 이야기
박수용 지음 / 김영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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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EBS 다큐멘터리로 본 시베리아호랑이 영상. 우리 아이도 어떻게 호랑이를 쫓아다니며 찍는 건지 무척 신기해하며 봤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시베리아호랑이를 관찰하며 기록한 다큐멘터리 PD의 이야기로 만나는 <꼬리>는 그래서 더 감동입니다. 카메라로 보이는 신비롭고 자극적인 영상 너머 호랑이들의 애환을 이해할 수 있는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997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야생 시베리아호랑이를 처음 관찰한 이후, 수십 년간 호랑이를 연구, 기록한 박수용 저자. 2003년 <시베리아 호랑이 3대의 죽음>이 세계적인 호평을 받은 이후 그는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벗어나 2011년 국제 NGO 시베리아호랑이보호협회(STPS)를 설립해 시베리아호랑이 보호 및 연구에 전념합니다.


정신적 자서전이라는 전작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으로 타임스로부터 자연문학의 고전이 되어 마땅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밀렵과 굶주림의 위협에 시달리는 왕대 '꼬리'와의 만남과 우정,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꼬리>가 10년 만에 출간되었습니다. 시베리아 호랑이 3대에 등장했던 암컷 호랑이 블러디의 새끼 호랑이 중 독립한 호랑이도 슬쩍 언급되어 왠지 반가웠습니다.


<꼬리>의 배경은 동해에 맞닿아 있는 라조 자연 보호구입니다. 오래전 이곳은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 해서 조선곡이라 불리는 까레이스키 바찌입니다. 동물들이 염분을 섭취하기 들르는 소금절벽이 있고 조선강이 흐르는 곳입니다. 


그 소금절벽으로 온 사슴을 노리는 시베리아호랑이를 지켜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호랑이는 꼬리를 살랑이며 한 시간을 꿈쩍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슴이 나타나자 살랑이던 꼬리의 움직임이 멈추고. 드디어 사냥의 타이밍을 만날 수 있는 걸까요.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다 어느 순간 꼬리가 관찰 시야 밖으로 사라져버립니다. 사냥을 포기하고 떠났구나 싶어 잠복지에서 나와 주변을 살펴보는 순간, 싸한 느낌이 몰려옵니다. "나는 그를 볼 수 없지만 그는 나를 보고 있다."는 문장만으로도 서늘해집니다. 잠시 뒤 기운이 천천히 사라집니다.


그 호랑이는 바로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힘센 으뜸 수호랑이 왕대입니다. 이마에는 임금 王자, 뒷덜미엔 큰 大자가 뚜렷하게 있습니다. 현재 이 숲의 왕입니다. 하지만 발자국 흔적으로 미루어 보건대 기운이 쇠락해져가는 늙은 왕대입니다. 박수용 저자는 이 호랑이에게 '꼬리'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오랜 세월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을 찾아 잠복해 카메라를 설치하고 호랑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촬영 방식은 멸종 위기의 시베리아호랑이에게 피해만 주는 일이라는 걸 점점 깨닫습니다. 인간의 냄새, 총구를 닮은 렌즈 모양, 무인카메라의 쇠 냄새, 미세한 센서 소리 등이 시베리아호랑이에게 피해만 주는 일이라는걸요. <꼬리>에서도 센서가 설치된 곳을 한참 쳐다보다가 결국 방향을 틀어버리는 '꼬리'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멧돼지나 사슴 사냥이 짧은 도약만으로도 수월했을 테지만, 이제 '꼬리'는 전성기를 넘긴 상태입니다. 최근 급부상한 호랑이 '하쟈인'과의 세력 다툼이 치열해집니다. '꼬리'가 '하쟈인'에게 왕대의 자리를 넘겨준다는 것은 그저 이인자로 내려오려는 것이 아닌 냉혹한 생존 투쟁의 정상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이라고 합니다.


'꼬리'는 암컷 호랑이와 잠시 함께 다니며 마지막 호황기를 누립니다. 이즈음 몸이 무거워지고 힘이 예전 같지 않으니 굶주림을 겪게 되자 가축을 습격하게 됩니다. 울타리가 처진 목장 안으로 들어와 소를 죽이고, 말을 습격한다는 것의 의미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는 걸 저자의 이야기로 알게 되었습니다.


마을로 내려와 가축을 습격하는 호랑이는 합법적으로 사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피해 가축 주인은 협회에 제보하는 대신 전문 포수를 불러들여 잡아 암시장에 내다 파는 게 훨씬 남는 장사였던 겁니다. 저자가 몸담은 협회 STPS에서는 호랑이와 민가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 보상, 상당한 액수의 제보료 등이 인간의 욕망에 의해 부끄러울 지경으로 치닫는 여정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왜 박수용 저자는 이렇게라도 해서 호랑이를 살리려는 걸까요. 먹을 게 없어 개구리를 잡아먹는 '꼬리'의 모습은 늙고 느려져 배고픔에 시달리는 서글픔을 안겨줍니다. 렌즈를 사이에 두고 응시하며 서로의 존재를 느낄 만큼 인간과 호랑이 간의 묘한 연결이 생깁니다. 그는 꼬리의 죽음이 인간이 손댈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의 방식대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길 바라길 뿐입니다. 오지의 반 평짜리 땅속 잠복지 비트에서 지내다 보면 온갖 생명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들도 태어나 살기 위해 고민하다 사라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결코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는 생명들을 오롯이 지켜보며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인간이나 인간의 구조물을 피해 다녀야 정상인 호랑이의 습성이 무너지는 일들을 겪기도 하고, 가축 습격이 습관화되지 않기 위한 협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첩첩산중의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꼬리'가 지목당하며 사살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면서 긴장감이 치솟습니다. 평소라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 '꼬리'와 소통하는 방식이었고 '꼬리'에게 애정을 표하는 최선의 방식이었는데, 건초 창고에 갇힌 채 재회한 '꼬리'가 냄새를 맡곤 처음으로 그에게 무심한 척 꼬리를 슬쩍 뒤척이는 장면은 울컥할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꼬리'가 위엄 있는 죽음, 자연에 순응하는 죽음을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이 진하게 느껴지는 <꼬리>. 박수용 저자의 바람은 이뤄질까요. 긴장감 넘치는 진행 속에서도 종을 넘어선 연민을 자아내는 저자의 목소리가 울림이 큽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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