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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기념하라 - 카체트에서 남영동까지, 독일 국가폭력 현장 답사기 ㅣ 보리 인문학 2
김성환 지음 / 보리 / 2021년 12월
평점 :
카체트에서 남영동까지, 독일 국가폭력 현장 답사기 <악을 기념하라>. 두꺼운 책이지만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홀려 읽었습니다. 독일이 과거사를 어떤 방식으로 청산하고 있는지 우리 과거사 청산과 비교해 보며, 시민운동과 시민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소위 학생 운동권 출신으로 전두환 정권 때 시위로 서울대 제적을 당하고 징역살이를 했던 김성환 저자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서 20대를 보내고, 이후 역사 편집자로 출판계에 몸담았습니다. 현재는 남영동 대공분실 인권기념관추진위원회 상임 공동 대표로 한국의 독재 과거사 청산을 위한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에 공산주의자들의 반체제 활동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만든 조사 시설입니다. 놀랍게도 이 건물은 한국 건축계의 거장 김수근이 설계했었고, 더 경악스러운 점은 애초부터 고문을 위한 시설로 건축되었다고 믿을 만한 점들이 설계도면에 표시되었다는 겁니다.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폭력을 당했습니다. 1985년 515호에서는 민청련 사건으로 김근태가 10여 차례 물고문과 전기 고문을 당했고, 1987년 509호에서는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사 당한 곳입니다. 그런데 김근태 고문방은 텅 빈 채 아무것도 없습니다. 국가폭력이 자행된 다른 시설들도 이미 재건축되어 흔적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한국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문 수사의 현장이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입니다.
그 무렵 독일 방문을 계기로 독일에는 나치 과거사를 성찰하게 하는 장소가 많다는 걸 목격합니다. 독일의 나치 과거사 청산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독일과 폴란드 곳곳에 남아 있는 나치 및 동독과 관련된 수많은 기념관과 박물관을 탐방하게 됩니다.
과거사 청산 문제를 떠올리면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독일 총리는 수차례 사과를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기에 민족성의 차이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사실상 독일의 과거 청산 역사를 살펴보면 초반엔 일본과 전혀 다를 건 없었다고 합니다. 독일도 전범에 대한 강력하고 깔끔한 청산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68학생운동, 1980년대 미국의 홀로코스트 방송을 계기로 일어난 반성운동, 1980년대 역사 수정주의 논쟁, 1990년 독일 통일 후 일어난 동독 과거사 청산 논의 등 수십 년에 걸친 노력이 보태진 결과입니다.
무엇보다 독일 국민들은 당시 스스로 히틀러를 지지했었고 묵인했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 대통령을 선출했고, 독재와 폭력·학살에 눈을 감았습니다. 여기서 독일로부터 배워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정파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해버렸지만, 독일은 어느 당이 집권하더라도 과거사 청산은 변하지 않는 고정된 상수라는 겁니다.
<악을 기념하라>에서는 나치의 반인류 범죄를 증명하는 장소를 사진과 함께 소개합니다. 메르켈 총리가 사죄한 장소로 잘 알려진 다하우 강제 수용소 기념관은 최초의 강제수용소입니다. 나치당 정권 초기에는 좌파 사회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구금 시설용으로 만들었지만, 2차 대전 때부터 유대인 절멸 정책으로 표적 삼았다고 합니다.
김성환 저자는 기념관 조성에서 장소성의 중요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짚어줍니다. 발키리 작전이라는 쿠데타 계획이 실패하고 주모자 5명이 처형된 장소에는 현재 청동 인물상과 총살 집행자들의 자리인 길고 낮은 청동 단이 놓여 있습니다. 그곳에 서 있을 때 그 장소가 주는 공포와 슬픔이 혼재된 감정을 느낄 겁니다.
모든 수용소의 모델 하우스 격인 작센하우젠 수용소는 현재 날 것 그대로의 나치 과거와 직면하도록 복원해뒀다고 합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기념관을 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신축하는 것보다는 기본적으로 원형을 보존하는 게 원칙입니다. 폐허 같은 공간은 오히려 의도적 설계인 겁니다. 기념관은 가해자를 기억하고, 피해자를 추모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공포의 지형도 기록관도 인상 깊습니다. 친위대 본부, 비밀경찰 게슈타포 본부, 중앙안보국이 사용하던 건물이 있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한 담론이 30여 년 가까이 이어졌었고, 시민운동으로 무리한 복원을 하지 않은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된 여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잘못된 복원은 공포 체험관 같은 느낌뿐이며 역사의 무게를 날려버리게 됩니다. 지금은 달라졌다지만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무리한 복원 사례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악을 기념하라>는 독일 현대사,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이해하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합니다. 중앙정보부, 보안사 같은 기관의 흔적이 사라진 우리나라에서 실체가 보존된 유일한 공간인 남영동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남영동 보존을 위한 시민운동을 통해 2023년 6월 (가칭) 민주인권기념관이 개관될 예정이지만, 그 여정이 참 파란만장했다는 것도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습니다.
경찰청이 퇴거하도록 시민운동을 벌였고 건물 신축 관련해서도 부침이 참 많았지만, 이 건물과 시설들을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할 것인지 시민 사회에서의 공론화가 필요하기에 이 책을 내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부동산 사업과 만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는 걸 경고합니다. 기념관이 세워지면 기념관 교육과 관련한 방향도 면밀히 살펴봐야 합니다. 이 역시 독일 사례를 벤치마킹해 짚어줍니다. 국가폭력은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바람이 잘 실천되도록 앞으로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을 주목해야겠습니다.
아픔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를 직시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악을 기념하라>. 상처를 드러내고, 기억하고, 치유하는 방법으로 독일 나치 과거사 청산 사례를 통해 우리의 과거를 들여다보게 하는 의미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