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은 방 박노해 사진에세이 4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여 년 동안 세계 빈곤지역과 분쟁지역을 다니며 평화운동을 펼친 박노해 시인. 지상의 멀고 높은 길을 걸으며 기록해온 유랑노트는 박노해 사진에세이 시리즈 <하루>,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길>로 선보였고, 이번에는 방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선사하는 <내 작은 방 (My Dear Little Room)>으로 2022년을 열어봅니다. 


흑백 필름카메라로 에티오피아, 인디아, 페루, 버마, 파키스탄, 수단, 몽골 등 세계의 토박이 마을과 그 작은 방들을 순례한 박노해 시인. 어둠과 빛의 조화가 묵직한 울림을 주는 성채 도시 곤다르, 안데스 만년설산 고원의 돌집, 어둠이 내려앉은 동굴집에 은은하게 불빛이 비치는 작은 방… 지도에서조차 찾기 힘든 곳에도 사람이 있었고, 그들이 머무는 안식처가 있었습니다. 자연과 어우러진 채 대지의 품에 안긴 공간이 선사하는 경건함이 샘솟는 사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37점의 사진 속에는 자기만의 방을 가진 이들도 있고, 지상에 집 한 채 갖지 못한 채 유랑자로 떠도는 이들도 있습니다. <내 작은 방>은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터전인 공간적인 의미를 넘어 영혼이 숨 쉬는 방까지 확장합니다. 박노해 작가의 책은 한글과 영어가 동시 수록되어 있는 게 특징인데, 이번에도 아름답게 영문 번역된 글귀까지 읊조리며 한글과 영어의 또 다른 느낌을 받아봅니다.


어떻게 생계가 유지될까 싶은 곳에서도 해맑은 미소를 자아낼 줄 아는 순수함을 간직한 채 온 가족이 저마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고자 하는 가치를 실천하는 박노해 시인의 마음이 절로 공감되기도 합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임에도 나그네의 손을 이끄는 그들의 온기가 스며드는 느낌입니다.


유목민, 집시처럼 유랑자의 삶을 사는 이들에겐 잠시 쉬었다 떠나는 방일뿐이지만, 번듯하게 집이 있는 생활을 하는 도시인보다 못한 삶이란 건 없습니다. 스스로 길이 되어 인생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 작은 방>에는 희망의 꿈이 자라는 방도 있습니다. 인디아의 한 여성은 재봉틀로 작품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고, 아프가니스탄 국경 마을의 한 소녀는 자수를 놓고 있었습니다. 자기만의 방에서 말이죠. 버지니아 울프는 성찰하고 사유하는 자기만의 방을 소망했듯 <내 작은 방>에는 '나 자신을 지켜낼 독립된 장소'로서의 방을 보여줍니다. 지금 당신의 방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요.


"자기만의 방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행위와 마음은 다음날 세계의 사건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 책 속에서


나라를 잃고 떠도는 세계 최대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난민 가족의 단칸방에는 아홉 식구가 전기도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버틸 수 있는 건 어깨를 펴고 용기를 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인한 심지 덕분입니다.


우리 모두의 첫 번째 방은 엄마의 품이라는 박노해 시인의 글귀에 울컥하기도 합니다. '가장 작지만 가장 위대한 탄생의 자리'인 엄마의 등에 업힌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내 아이를 언제 마지막으로 업어줬는지 기억을 되살리다 보니 복잡미묘한 감정이 휘몰아칩니다.


<내 작은 방>을 덮을 때 즈음엔 물욕이 다 뭔가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고요해지는 마음에 스스로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혜택을 당연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관점을 비틀어보게 하는 사색의 시간을 안겨줍니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도 황폐해지지 않는 마음을 간직한 이들에게서 오히려 치유를 받게 됩니다.


꾸준히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을 개최하고 있는 서촌에 위치한 라 카페 갤러리에서는 2022년 <내 작은 방>展을 전시합니다. 에세이 <내 작은 방>에 등장한 박노해 시인이 찍은 흑백사진 37점을 직접 감상할 수 있습니다.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울림을 받았는데, 대형 흑백사진 작품으로 만난다면 감동의 수준이 다를 것 같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