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뒤에 선 아이
박주현 지음 / 우리나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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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영상진흥원 2020년 다양성만화 지원사업 분야 선정작, 박주현 작가의 <빛 뒤에 선 아이>. 한국 그래픽노블계의 꾸준한 성장의 결실을 엿볼 수 있는 멋진 작품입니다. 우리나비에서 단행본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림책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박주현 작가는 알비노 외국인을 우연히 길에서 보고 막연하게 신비롭다는 생각으로 알비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알비노를 향한 편견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된 것이 <빛 뒤에 선 아이> 작품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전자 돌연변이로 멜라닌 색소가 결핍되어 백색증을 앓는 사람이나 동물을 가리키는 알비노. 문학 작품 속 요정이나 신비로운 존재를 묘사할 때 등장하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알비노는 마녀사냥의 희생양이었습니다. 게다가 알비노를 향한 학살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발병률이 높은데 특히 탄자니아에서는 알비노의 신체가 행운을 가져온다는 미신이 있어 갓난아기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신체 훼손 및 시신 거래 등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 한마디로 사냥을 당하는 경악스러운 일이 비일비재한 겁니다. 유럽의 홀로코스트 역사는 알려져 있지만, 지금도 행해지는 아프리카의 알비노 학살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알비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피부, 모발, 눈 등의 멜라닌 색소가 결핍되거나 결여된 비정상적인 개체."라고 말이죠. 여기서 뭔가 불편한 게 느껴지지 않는지요. 결핍, 결여, 비정상. 이 단어들은 '다름'을 넘어 정상과 '분리'시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부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사전적 정의보다 차라리 백색증은 멜라닌 색소를 합성하지 못해 생기는 선천성 희귀 유전질환이라고 표현할 때 미묘하게 거슬렸던 부정적 느낌이 덜해집니다.


<빛 뒤에 선 아이>의 주인공 유진은 백색증을 앓고 있습니다. 알비노 청소년들이 가장 힘들어한다는 여름의 고통과 그 고통 너머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가을을 배경으로 그려냅니다.


"가끔, 꿈을 꾼다. 그냥 평범하게 화창한 날에 바다를 바라보는, 그런 꿈." - 책 속에서


백색증은 시력 상실, 피부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 일상생활하는 데 큰 불편을 겪는다고 합니다. 외출할 때는 노출 부위에 선크림을 꼼꼼히 발라야 합니다. <빛 뒤에 선 아이>의 유진은 한여름에도 모자, 마스크, 선글라스, 장갑까지 착용하고 나섭니다. 맨눈으로 햇빛을 보면 안 되니, 찬란한 풍경을 맨눈으로 본 적도 없습니다. 너무나도 흔하고 평범해서 지나쳤던 일상의 풍경마저도 유진에게는 멀기만 합니다. 해가 진 밤의 풍경이 그나마 익숙합니다.


주변인의 노골적인 시선은 어렵게 버티고 버틴 자아를 곧잘 무너뜨리곤 합니다. "신기하네. 눈도 하얗나?"라는 말처럼 악의는 없었다 할지언정 신기하다는 것만으로 감정을 다치게 하는 일이 쉽게 일어납니다. "얼굴 하얀 것 봐. 부럽다 진짜."처럼 표면적인 면만 얼핏 보고 백색증을 앓는 사람의 고통은 짐작하지 못한 채 부러움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저도 백색증을 앓는 사람을 가까이서 대한 경험이 있는데 속눈썹까지도 하얀 모습을 보며 순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동공지진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곁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뒤돌아보며 수군거리던 속삭임의 울림은 제 귀에도 잔상으로 남을 정도였습니다. 관찰 당하는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돌리 추그는 책 <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행하는 무의식적 편견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빛 뒤에 선 아이>의 유진을 향한 시선 중에 그런 사례가 있습니다. 주변인들의 시선과 언행에 적응을 한듯한 무심한 반응을 보이더라도, 정신적으로 얼마나 스트레스가 쌓여있을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빛 뒤에 선 아이>에는 검은 고양이와 핑크 돌고래가 등장합니다. 검은 고양이를 단지 털 색깔만으로 재수 없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피부암을 앓는 상황에서도 동물원 쇼를 시키는 희귀한 핑크 돌고래처럼 겉모습만으로 이용되고 고통받는 동물. 그 동물들이 받는 차별과 유진을 향한 외부인의 시선을 연결하는 부분이 세심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괴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별의 아이처럼 신비롭게 바라보는 극과 극의 시선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유진의 내밀한 감정마저도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글로 표현했고, 수채화와 색연필의 어우러짐으로 감정과 변화를 오롯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백색증을 앓는 유진의 감정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빛 뒤에 선 아이>. 편견을 이겨내며 성장하는 유진의 여름과 가을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유진이 바라는 것은 사실 거창한 일들이 아닙니다. 낮밤이 바뀐 생활을 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며 그만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겁니다. 다양성은 언유주얼(unusual)을 수용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가 아직 배워야 할 게 많다는 걸 깨닫게 하는 <빛 뒤에 선 아이>. 유진의 고통과 성장을 바라보고 나니 제목마저도 진한 울림으로 자리 잡습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콘텐츠 창작 지원 사업은 2018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진행되고 있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작가 지원 프로그램입니다. 창작 초기 단계 지원, 다양성만화 제작 지원사업, 만화 독립 출판 지원, 만화 콘텐츠 다각화 지원, 수출작품 번역 지원 등으로 나뉘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박주현 작가의 그래픽노블 <빛 뒤에 선 아이>는 상업성을 떠나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실험적인 만화, 대안적 성격의 작품 창작을 지원하는 다양성만화 제작 지원사업의 2020년 선정 작품입니다. 앞으로도 편견의 틀을 깨는 놀라운 작품들이 탄생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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