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 - 코스믹 호러 × 제주설화 앤솔로지
전건우 외 지음 / 들녘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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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에 의해 본격화된 '우주적 공포' (cosmic horror)는 전설과 그 결이 무척 잘 어우러집니다. 크툴루 신화를 창작한 러브크래프트식 호러가 낯설다면, 괴이한 설화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가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괴담, 호러 전문 출판 레이블이자 한국 호러 문학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괴이학회의 여섯 작가들이 제주 설화를 바탕으로 한국형 코스믹 호러를 만들어냈습니다.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는 제주도 고유 신화, 전설, 민담을 재해석해 독특한 공포를 선사합니다.​ 6인 6색의 공포 단편 모음. 분명 한국이지만 제주도만의 고유한 특색을 간직한 제주 설화의 매력을 압축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전건우 작가의 <광기의 전원>은 어느 날 새벽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됩니다. 오래전에 사라졌던 민속학자 친구. 제주 설화가 실재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연구하던 친구로부터 무려 5년 만에 연락이 온 겁니다. 대뜸 하는 말이 "서천꽃밭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네."라니, 드디어 이 친구가 미쳤구나 싶습니다.​


서천꽃밭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펼쳐진 광대무원한 정원입니다. 거기엔 수많은 꽃들이 있는데 기이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생불꽃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멸망꽃도 있습니다. 웃음웃을꽃, 울음울을꽃, 뼈오를꽃 등 이름으로 그 능력을 짐작할 만한 수많은 꽃들이 있는 곳. 서천꽃밭이 상상의 장소가 아니라 진짜 존재하는 걸까요. 제주로 내려간 '나'는 눈빛만은 생생한 친구를 만나 그의 탐사에 동행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끝 모를 인간 욕망을 다룬 <광기의 전원>에 이어 전혜진 작가의 <단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둑한 슬픔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펼치는 코스믹 호러인 만큼 공포감 아래에 자리한 억울한 원혼의 비통함이 몰려와 더 스산해지는 기분입니다. 저주라는 미지의 공포와 연결해 제주 4·3 사건을 알리고 있어 울컥하며 인상 깊게 읽은 소설입니다.​


정명섭 작가의 <수산진의 비밀>은 제주로 유배를 간 박시혁의 시선으로 진행합니다. 육지와 여러모로 다른 괴이한 섬이라고 다들 한목소리로 이야기하니 유배살이에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듭니다. 어느 날 수산진 성벽에서 나는 기이한 소리를 들은 데다가 수산진성을 쌓을 때 일어난 인신공양 이야기를 알게 됩니다. 제주 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설문대할망으로부터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형벌을 받은 땅속 깊은 곳에 사는 신에게 재물을 바쳤다는 겁니다.


​미신으로 점철된 이곳이 무척 미개하게만 여겨져 인신공양의 증거를 찾아 공론화하고 이들을 교화시키고픈 사명감에 결국 몰래 성벽을 파헤치는데... 산재물을 바치는 인신공양 설화는 언제 들어도 섬뜩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반전이 도사리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황모과 작가의 <딱 한 번의 삶>은 이어도에서 수백 번의 타임리프를 하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생을 놓으려고 작정한 여자가 깨어난 곳은 제주 남쪽 바다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있는 전설의 섬 이어도.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깨어난 사람은 여자뿐만 아니라 어린 임산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 중 한 명만 이 섬에서 나갈 수 있다? 반복되는 윤회의 지옥을 탈출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이 소설은 지옥의 영겁을 반복하는 주인공이 누구에게나 평범하고 온전한 딱 한 번의 삶이 허락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글이라는 작가의 후기가 울림을 줍니다.​


김선민 작가의 <뱀무덤>은 제주도 김녕사굴 뱀신 신화를 재해석해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을 오마주한 소설입니다. 민속학자인 지도교수와 함께 제주도 출장을 간 대학원생. 제주도에서도 외딴섬에 있는 뱀신 전설이 있는 동굴을 발견한 그들이 동굴 끝에 다다르자 마주한 것은 도무지 인류 문명권에서 만든 건축물이라고 할 수 없는 지하도시입니다. 고대 미지의 도시 앞에서 희열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인신공양과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 사항의 전설이 담긴 이 신화는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될까요.


사마란 작가의 <영등>은 모두가 가족인 지상낙원을 만든 한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룹니다. 일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들은 모두 함께 작업을 하며 아픈 사람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마을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영등할망이라 불리는 영등신이 현신해 있다는 이곳으로 시집온 '나'. 현지인들도 이 마을엔 쉽게 들어갈 수 없다는 이곳에서 '나'는 잘 적응할 수 있을까요.


여섯 작가의 작품이 모인 만큼 취향의 온도차는 분명 있지만, 편당 길이가 짧아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이승과 저승, 무당, 굿, 인신공양 등 설화에 자리 잡은 소재들은 사실 그 자체로 살짝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은, 께름칙한 느낌이 들긴 했었는데 현실의 인물들과 연결되니 생생하게 소름 끼치는 잔상이 꽤 오래가더라고요. 제주 여행을 가더라도 외진 곳을 걸을 때면 이 이야기들이 문득문득 생각날 것만 같아서 더 아찔해지긴 하네요.​


흔히 알고 있는 서양 신화만큼이나 많은 신들이 있는 제주도 신화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제주 설화와 관련된 소재를 만날 기회가 되면 쭉 접해보고 싶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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