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나라
이쓰키 유 지음, 김해용 옮김 / 밝은세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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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요코미조 세이지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 데뷔작 <무지개를 기다리는 그녀>로 인상 깊은 여운을 남긴 이쓰키 유 작가의 신간 <은빛 나라>. 전작에서는 자의든 타의든 배제된 인물들이 등장하는 자살 문제를 인공지능과 연결해 펼쳐 보였다면 이번에는 VR (가상현실) 게임과 연결해 오싹한 스릴감이 더 생생하게 전달되는 듯한 효과를 톡톡히 내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공부, 동아리 활동, 인간관계... 조금이라도 싫증이 나면 지속하지 못하고 도망친 시오리. 요령껏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모른 채 도망치기의 달인이 된 시오리는 어느 날 벤처회사 사무직 면접에 도전하기로 결심했지만, 그 결과는 납치 감금을 당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시오리를 납치한 인물은 삶에 지친 사람들을 VR 게임 '은빛 나라'에 모여들게 한 다음 자살하도록 만들겠다는 계획을 가졌습니다. 은빛 나라의 가이드 역할로 시오리를 점찍고 그녀를 반 년 이상 감금하며 가이드 안나로 키워냅니다.


한국 자살 사망률은 2020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1만 3799명으로 하루에 37.8명꼴입니다. 변변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혼자 고뇌하면서 세상이 외면한 이들입니다. 이쓰키 유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전 자살 방지 대책 현장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소설 <은빛 나라>에서는 자살을 막기 위해 상담 활동을 하는 단체 '레테'를 운영하는 주인공 고스케를 포함해 상담자들의 다양한 면모를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는 고스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미유키 등이 등장합니다.


상담자가 목숨을 끊게 될 경우 상담원들은 무력감에 빠져듭니다. 자신의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 심란해집니다. 오래전부터 알던 히로유키의 자살로 죄책감에 고통받는 고스케는 히로유키의 죽음이 일반적인 자살 동기와 맞지 않음을 의심하던 차에 그의 누나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자살 충동을 느끼는 영상이 존재할까"라며 히로유키가 죽기 전 사용한 VR용 고글을 보여줍니다. VR 영상이 히로유키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걸까요.


평소 자해 습관이 있는 재수생 구루미 사례는 남들이 보면 별것 아닌 고민 같아 보이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피폐하게 만들고 삶의 행복을 현실 세계에서 전혀 찾지 못한 채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는 인물의 전형입니다. 그러다 우연히 SNS에서 누군가로부터 권유받은 '은빛 나라'. 그곳은 지친 사람들이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안전지대라고 합니다. 아직 실험 단계의 게임이기에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 속에서 구루미는 은빛 나라에 빠져듭니다.


은빛 나라에서는 현실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세계를 맛볼 수 있습니다. 구루미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이들이 그곳에는 있습니다. 우울감, 고립감으로 점철된 현실 세상을 벗어나 은빛 나라에서는 즐거움과 만족, 행복을 만끽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은빛 나라에서 필요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미션도 있습니다. 사진을 찍어 올리는 단순한 미션으로 시작하다가 점점 미션의 방향이 괴이해지지만, 은빛 나라의 달콤한 행복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미션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은빛 나라의 진짜 목적은 자살 게임입니다. 이 게임의 개발자는 고통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면 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공포가 두려워 차마 죽지 못하는 이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쉽게 극복할 수 있게 접근한 것이 바로 은빛 나라입니다. 절망에 빠진 채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모인 은빛 나라. VR에서는 누구도 두려움 없이 죽을 수 있기에 반복적으로 연습 시키는 셈입니다.


은빛 나라는 자살 유도 게임인 '푸른고래' 사건을 모티브로 합니다. 러시아에서 시작된 온라인 자살 게임인 푸른고래는 누군가 SNS를 통해 지시를 내리고 참가자는 그 지시를 이행한 뒤 인증해야 합니다. 50일 동안 매일 다른 지시를 이행하는데 처음엔 음악 듣기처럼 단순한 미션이지만 차곡차곡 정신적 대미지를 입히는 미션들입니다. 최종 단계 미션은 바로 건물에서 뛰어내릴 것이었습니다. 2016년 필립 부디컨이 발명한 이 미션 수행 게임은 세계적으로 유사 사건이 발생하며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자살 게임이 모방 자살, 집단 자살 같은 사회적 대참사로 이어지게 된 사례입니다.


자신의 고통은 시시한 문제라고 스스로 자책한 구루미처럼 고통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현실을 버텨낼 무언가를 도무지 찾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가 가슴 아픕니다. 목숨을 걸고 극한의 게임을 하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처럼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오히려 너무나도 살고 싶어서, 현실을 살아내고 싶기에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은빛 나라'일 겁니다.


게임의 실체를 밝히려는 고스케를 중심으로 게임에 관여된 인물들의 다양한 심리를 보여준 <은빛 나라>. 자살이 그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말은 살고 싶다는 또 다른 표현임을 드러내는 의미 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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