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 - 현대어로 쉽게 풀어 쓴 근대 여성 문학 모던걸
강경애 외 지음 / 텍스트칼로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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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세월이 흘러도 공감할 수 있는 여성 작가들의 주옥같은 글을 만나는 시간 <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 대전에서 독립서점을 운영하며 단행본을 기획하는 텍스트칼로리에서 근대 여성 문학 시리즈를 내놓았습니다. 남성 중심 문단에서 비주류였지만 목소리를 내려고 애쓴 여성 작가들의 소설, 수필, 시 작품을 선정해 현대의 시선으로 큐레이션하고 현대의 언어로 담아 선보인 모던걸 시리즈.


<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은 1890년대~1910년대에 출생해 20세기 초반 작품 활동을 펼친 백신애, 노천명, 나혜석, 강경애 네 명의 작가들의 수필 21편을 담았습니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던 시기에 근대적 사고방식을 갖춘 신여성을 일컫던 모던걸. 오늘날까지 관통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 여성 동우회, 여자 청년 동맹 등에 가입한 것 때문에 해임 당한 백신애 작가는 1929년 조선일보 「나의 어머니」로 등단합니다. 백신애 작가의 글을 읽어보진 못해서 작가의 문체 스타일은 알 수 없지만 수필은 꽤 재미있네요.


<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에는 5편의 수필이 실렸는데, 신혼여행을 주제로 기고한 <슈크림> 글은 특히 유머 감각이 돋보였습니다. 당시 신혼여행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공장, 회사를 견학하라며(?!) 오사카행을 권유하셨고, 아버지 말씀에 차마 반대 못하고 오사카로 떠나는 상황을 보니 아찔해집니다. 그래도 남편이 꽤 센스 있는 행동을 하네요. 둘은 다른 지역으로 새어버립니다. 그런데 막상 다른 곳에 도착해 둘러봐도 풍경은 거기나 여기나 크게 감흥은 없고, 오히려 슈크림에 대한 에피소드만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았다고 합니다.


슈크림을 좋아한다는 말에 남편이 한 상자를 안겨줬는데, 열 개를 한자리에서 먹게 된 사연은 배꼽 잡습니다. 나중에야 "나야 체면으로 권했지만 당신의 위 주머니도 상당히 야만적이던데."라는 남편의 말에 빵 터질 수밖에 없었어요.


신혼여행을 마치고 온 후, 슈크림은 쳐다보기도 싫어진 백신애 작가의 이야기 외에 그 시대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수필도 인상 깊었습니다. 종달새에 관한 이야기가 두 편이나 실렸는데, 요즘은 농약 피해로 보기 힘들어진 종달새(노고지리)가 집 근처에서 흔하게 지저귄 시절이었다니 향수를 자아내게 합니다.


<사슴>으로 유명해진 시인으로 잘 알려진 기자 출신 작가 노천명. 권력에 휘둘린 전적 때문에 작품의 가치가 묻히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모던걸 수필집에는 7편의 글이 수록되었는데, 직장 생활을 하는 독신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고군분투가 담겨 있어 의미 있습니다. 신문기자 생활을 10년간 하며 여성에게 한해 이것은 화려한 직업이 아님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졸업하자마자 취업한 신문사에서 정신 바짝 차리다 보니 오히려 '찬바람 분다'는 소리를 이성 기자들에게 듣습니다.


"작가란, 작품 활동에 있어서 놀고 있는 것같이 보여도 머릿속에서는 늘 바쁘게 일을 하고 있다."며 작가 생활을 하려면 최소한의 생활 보장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일정한 수입을 갖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는 고역이지만 일을 해야만 한다고 말이지요. 최저 생활의 확보를 위해 언제나 '짬'을 가질 각오를 한 노천명 작가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어느 날은 시골 오두막에서 참외를 먹다가, 시골에서 이렇게 먹는 걱정 외에는 별 걱정 없이 한가로이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자 참외밭 노인이 한 말이 명언입니다. "먹는 걱정이 그게 작은 걱정 아니죠."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최근 가장 관심 있게 눈여겨본 근대 여성작가 중 한 명입니다. <모던걸 수필집>에 실린 네 편의 수필은 기존에 읽어보지 않았던 글들이어서 반가웠어요. 


유학 시절 일본인 N군과의 질긴 인연의 에피소드는 섬뜩해 뜻밖의 놀라움을 안겨주었고, <젊은 부부> 글은 신혼시절에 발표한 글인 줄 착각할 정도로 이상적인 결혼관을 엿볼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혼을 앞둔 시기에 내놓은 글이어서 놀랐습니다. 여성의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나혜석의 삶과 닮은 글을 만날 수 있기도 합니다. 주부의 권위에 주목해 쓴 프랑스 가정을 소개하는 글이 인상 깊습니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 향상을 위한 운동에 참여한 강경애 작가는 1931년 단편소설 「파금」으로 데뷔합니다. 이전 세 작가의 글이 지금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그려냈다면, 강경애 작가의 글은 문학적 감수성이 담긴 글이어서 또 다른 읽는 맛을 안겨줍니다. 황해도 출신 작가인 만큼 몽금포, 섬몽금이, 장산곶 주변 가난한 어촌 생활을 그려낸 글은 낯설면서도 그 시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있습니다.


한국 근대 수필을 읽으며 그 시대의 생활상과 의식 수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백신애의 글에서는 재래의 인습을 타파하려는 개명꾼을 향한 존경과 비난의 이중성을, 노천명의 글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참외 재래종의 종류를 한껏 만날 수 있었고, 나혜석의 글에서는 유교적 억압을 무릅쓰고 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찾으려 하는 용기를, 강경애의 글에서는 그 시대 가난하지만 억척같이 꾸려간 민중의 삶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은 100년 전 모던걸이 이 시대를 사는 모던걸에게 들려주는 일상의 이야기입니다. 굴곡 많은 작가들의 삶 때문에 수필집을 펼치기 전에는 거창한 주제의식이 담긴 목적 있는 강한 글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소박한 일상의 이야기였기에 색다른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100년 후 모던걸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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