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발견 - 앞서 나간 자들
마리아 포포바 지음, 지여울 옮김 / 다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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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세기에 걸쳐 시대를 앞서나간 자들의 교차하는 삶을 이야기한 <진리의 발견>. 과학, 문학, 예술 분야를 넘나들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열 명의 인물들의 전기이자 얽히고설킨 삶을 통해 변화를 이룬 역사의 퍼즐을 맞추는 시간입니다.


표지 일러스트는 기하심리학자인 벤저민 베츠의 도표인데, 인간 의식의 진화 과정을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한 거라고 합니다. 의식의 출발점, 동물의 감각적 의식, 의식의 정점인 초월성을 단계별로 표현한 일러스트는 인식의 지평을 넓힌 인물들의 이야기와 잘 어울립니다.


문예비평가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을 읽다 보면 담백하면서도 유려한 문체에 감탄하게 됩니다. 한 편의 영화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도입부는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 만큼 마리아 포포바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제가 관심 있어 한 인물 편을 읽는 중에는 어느 지점에서 툭 건드려졌는지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 채 계속 읽기 힘들 정도로 울컥한 감정이 솟구치기도 했습니다.


요하네스 케플러, 마리아 미첼, 허먼 멜빌,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마거릿 풀러, 찰스 다윈, 윌리어미나 플레밍, 해리엇 호스머, 에밀리 디킨슨, 레이철 카슨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분야에서 대담한 사상가로 평가받는 열 명의 인물. 대부분 여성에다가 성소수자였던 그들은 시대의 장애물을 헤쳐나가며 그 시대가 속박한 틀을 벗어나고자 노력했습니다.


우연을 선택이라 착각하고, 기록을 역사라 착각한다면 아름다움 같은 어떤 진실은 상상과 의미 부여라는 빛을 슬쩍 비출 때 가장 명확하게 보인다고 말한 마리아 포포바. <진리의 발견>은 전기라는 직선의 그래프가 아닌 여러 측면과 여러 빛을 지닌 그림으로 그들을 나타내는 책입니다.


불멸의 위업을 달성한 표면적인 요소 뒤에는 인물들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가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렇기에 열 명의 인물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카메오처럼 등장하는 (역시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무척 많습니다. 이 책의 매력으로 제가 손꼽고 싶은 건 바로 이 점이에요. 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마리아 포포바의 의지가 잘 담긴 구성입니다.


"아름다운 삶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 진리의 발견 


점성술사이자 천문학자였던 케플러의 이야기는 기대 이상의 흥미진진함을 보여줍니다. SF 소설의 창시자 레이 브래드버리 이전에 이미 1609년에 최초의 SF 소설이 케플러의 손에 쓰였습니다. 천동설과 미신, 신의 세계를 살았던 시대에 달나라로 항해를 떠난 어느 젊은 천문학자에 대한 이야기 《꿈 (Somnium)》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하고 체계적인 노력을 통해 그 상상을 현실로 이루어낼 때 우리가 지닌 가능성의 범위가 확장된다는 걸 보여준 케플러는 이 소설 때문에 어머니가 마녀로 몰려 마녀재판을 받게 되는 비극에 처합니다.


케플러는 미신적으로 해석했던 무지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자 <꿈>의 주석을 본문과 맞먹는 분량으로 다는 작업을 하며, 상식적인 직관의 착각에서 벗어나 선구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데 힘쓰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소설이 정식 출판되기 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쓰러져 숨을 거두게 되어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339년 후 인류가 최초로 그의 법칙으로 계산한 궤도를 따라 달에 발을 내디디면서 실현됩니다.


천문학자로서의 케플러의 이야기가 다가 아닙니다. 몇 세기나 시대를 앞선 주장을 펼치기도 했는데요. 어머니와 같은 별자리에서 태어났지만 왜 어머니는 불학무식했고 자신은 천문학자가 되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했었습니다. 성별 구조에서 비롯된 운명의 차이를 본성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결정한 사회적 위치 때문이었음을 짚은 선구자였습니다.


케플러의 꿈은 수없이 많은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진, 미국 최초의 여성 천문학자 마리아 미첼로 이어집니다. 타고난 본성 이외에 여러 요소가 빚어낸 산물로서의 마리아 미첼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한 세기 후, 마리아 미첼의 전기를 읽은 한 소녀는 여자도 천문학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미첼이 개척한 길을 따라갑니다. 바로 우주의 암흑물질 존재를 최초로 입증한 베라 루빈입니다.


마리아 미첼은 여성의 지적, 예술적 자주권을 지키고 가정의 삶 대신 창조적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회적 삶을 선택할 권리를 주장한 빅토리아 시대 영국 시인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을 숭배했고, 그녀가 쓴 소설시 《오로라 리》는 자립을 통해 살아있음을 각성하라는 메시지를 건넸던 매혹적인 달변가로서 사실상의 여성주의 운동을 시작한 마거릿 풀러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진리의 발견>에서는 여러 인물들의 삶이 교차해 한 사람이 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순간을 엿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과학 작가 레이철 카슨의 삶은 잔잔한 애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진지한 과학과 진지한 문학을 잇는 환경보호운동가 레이철 카슨. '생태'라는 용어를 대중에게 소개했고, 그 유명한 《침묵의 봄》으로 현대인의 환경에 대한 양심을 일깨웠습니다.


DDT의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며 윤리적 분노와 생명이 있는 것들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 비통함이 담긴 이 책은 누구도 과학의 윤리적 측면을 이야기하지 않던 시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업적에서 비롯된 직간접적인 결과는 어마어마합니다. 환경보호국 탄생, DDT 금지, 멸종위기보호법 제정 등으로 이어집니다.


암에 걸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결국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별세한 레이철 카슨. 고통을 밝히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을 해내기 위해 애쓴 나날들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뭉클했습니다. 정신적 동반자였던 박물학자 도로시와의 사연도 애달팠고요.


과학도 문학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레이철 카슨 특유의 문체는 <진리의 발견>의 마리아 포포바가 그 결을 이어받은 느낌입니다. 담담히 사실을 써 내려감에도 어쩜 그렇게 아름다운 서사의 풍취를 내는지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시대를 살아가면서 좌절하고 고통받았음에도 시대를 넘어선, 앞서나간 자들. 840페이지라는 삶의 무게가 담긴 <진리의 발견>은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공적 생활에서 성취를 이룬 인물들이 어디에서 영향을 받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수많은 파편을 세심히 엮어낸 아름다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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