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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 미러 - 우리가 보기로 한 것과 보지 않기로 한 것들
지아 톨렌티노 지음, 노지양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2월
평점 :
<트릭 미러>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영드 '블랙 미러'입니다. 전자기기를 껐을 때 검은 화면에 본인의 얼굴이 비친다는 의미의 블랙 미러는 디지털 시대에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부작용을 다룬 드라마입니다. 왜곡이 있는 거울을 뜻하는 트릭 미러는 블랙 미러와 닮았습니다. 이 책은 인터넷과 연결된 여성의 삶을 중심으로 나 자신, 이 국가, 이 시대의 이해를 형성한 공적 영역 속 여성의 서사를 들려줍니다. 돌려까기가 예사롭지 않아 읽는 내내 통쾌함과 자기 성찰을 동시에 안겨 주는 책입니다.
지아 톨렌티로 작가는 1988년생 필리핀계 미국인으로 <뉴요커> 기자입니다. <트릭 미러>는 여성으로서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일명 페미니즘 책입니다. 그런데 보통의 페미니즘 책과는 읽는 맛이 다릅니다. 진지하고 냉철하면서도 그 속에 처절한 유머 코드가 있고, SNS적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세련된 문체를 갖춘 글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에세이인데도 저널리스트의 사회 탐사 여정을 보는 듯한 독특한 책입니다.
저자는 낯설지만, 얼마나 주목받는 (이슈 될 소지가 높은) 책인지는 책 뒷면을 빼곡히 채운 국내 영향력 있는 여성 인사들의 화려한 추천사가 대변합니다. 강화길 소설가, 김금희 소설가, 김하나 작가, 이길보라 감독, 이다혜 기자, 이슬아 작가, 장혜영 국회의원, 황선우 작가의 멘트 덕분에 기대치가 높아지네요.
지아 톨렌티노 저자는 밀레니얼 세대의 수전 손택이자 인터넷 시대의 몽테뉴, 그리고 소셜 미디어 시대의 글로리아 스타이넘으로 불립니다. 그만큼 비판과 성찰의 목소리가 옹골차다는 의미일 겁니다. 사회 비판과 자전적 에세이 그 어딘가에 자리 잡은 아홉 편의 에세이에서 그 목소리를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1999년에 처음으로 인터넷 시민이 되었다는 지아 톨렌티노.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 사이트를 찾았고 HTML 문서작성법을 배우며, 열 살의 나이에 인터넷 중독이 될 것 같다는 고민을 털어놓으며 자신의 존재를 디지털 방식으로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인터넷은 광기 어리고 과열된,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지옥임에도 왜 우리는 부족한 자유 시간을 고문 같은 환경에 밀어 넣고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정체성, 자기 홍보와 필연적으로 얽히는 연대, 우리가 하는 것을 통제 못하는 현실 등 지아 톨렌티노가 짚어주는 인터넷 왜곡에 관한 이야기들은 모두가 공감하는 것들입니다. 더 나은 버전의 나, 더 진실한 나를 보여주고 하는 욕망이 온라인 자아라는 신기루를 만들어내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열여섯 살 때 리얼리티 쇼를 찍은 경험을 오픈한 저자는 전형적인 십 대 판타지이자 자기기만을 실현하는 리얼리티 쇼에 대한 생각을 들려줍니다. 내가 느끼는 대로 행동하고 싶고, 내 진짜 모습대로 살고 싶은 꿈은 그 자체로 리얼리티 쇼가 되어가고 있었고, 이제는 모두가 자기의 삶을 찍고 기록하며 남들에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현대 사회라는 인공적인 조건 아래에서 진정한 자아를 만드는 게 왜 불가능한 일인지 오히려 드러나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시장의 법칙을 이해하고 재생산하는 평범한 여성이 이상적인 여성으로 진화하는 여정도 탐구합니다. 우리는 언제는 최적화 중이라는 말이 인상 깊습니다. 시장친화적이고 주류의 존재 방식이 된 페미니즘의 응원 아래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날카롭습니다.
똑똑하고 야망 있는 여성들이 빠지는 덫, 미모 신화는 자기 관리라는 진보적인 명칭으로 바뀌어 여전히 최적화 중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이 시대는 '라이프스타일의 신화'라고 말합니다. 여성의 몸을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하나의 자산으로 포장하는 물품은 늘어가면서 정작 우리는 임금을, 육아 제도를, 정치적 대표성을 최적화하지는 못한 현실을 지적합니다.
"이제 아름다움의 신화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의 신화라는 패러다임이 생겼다. 여성은 사용 가능한 모든 기술과 자본과 정치를 끌어모아 이상적인 자아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인정사정없는 자기 계발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페미니스트적이라고 이해하고 누가 뭐래도 한 여성으로서 세상을 가장 잘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믿어야만 한다." 책 속에서
문학 속 소녀, 성인 여성 캐릭터를 살펴보는 시간도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동화 속 소녀들은 모두가 씩씩하고, 어른 여주인공들은 모두 억울해한다고 합니다. 어린이 문학에서 소녀들은 자신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트라우마에 잡아먹히지 않지만, 성인 소설에서는 여성이 서사의 중심에 서기 위해 언제나 트라우마가 맨 앞자리에 놓인다고 합니다. 여성의 삶과 문학의 관계를 시대의 산물로 바라보는 관점이 눈길을 끕니다.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며 저널리스트 관점의 글을 쓴 지아 톨렌티노의 <트릭 미러>. 분명 느끼고 있었지만 말로 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끄집어낼 때 다뤄야 할 중요한 문제들을 짚어줍니다.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시장친화적인 페미니즘 문화를 비평하고, 종교적 도취와 마약을 교묘히 연결하는 안드로메다적 독특한 시선을 내보이고(이 파트만큼은 아직 이해 불가이지만), 성폭행과 인종차별로 얼룩진 모교의 역사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이상적인 여성의 삶에 대한 반전을 이야기하는 등 주제도 주제거니와 작가의 톡톡 튀는 문체는 관심 주제에 따라 변곡은 있겠지만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닌 것 같아요.
번역자도 고심을 많이 했을 정도라니 독자도 곱씹으며 읽어야 하는 책, 그럼에도 매력 있는 책이라는 건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삼십 대 초반의 밀레니얼 작가의 자기기만에 관한 고찰은 정말 놀랍거든요. 왜곡이 있는 거울 트릭 미러가 아닌 거울에 비친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고 싶은 욕망, 에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그래도 자신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