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미터O
이준영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의 마지막 세대가 30여 명 남아있습니다. 방사능 오염된 지구에서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린 인간. 마지막 한 명까지 죽게 된다면 지구에 더 이상 사피엔스는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생존한 인간들이 모여있는 시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SF 소설 <파라미터O>. 이 사람들이 모두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소녀는 창조주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 파라미터O 첫 문장 


남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오로지 강력한 쾌감을 선사하는 쾌감기와 수면실에 박혀 지내고, 활력이라곤 오히려 인간의 시중을 드는 작은 로봇들에게서만 느껴집니다.


시설에는 방사능으로 장애인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격리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격리된 채 살다 허무하게 죽은 낸시를 보며, 시설의 유일한 엔지니어 조슈는 삶의 목적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합니다. 전파수신기의 어떤 신호를 따라 시설 밖으로 탈주했던 낸시가 가려고 했던 곳은, 시설 밖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조슈의 엄마가 언젠가 말한 황혼 들판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폭력을 쓰면 감옥에 갇히듯 남은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법을 적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존을 두고서는 흔들리기 쉬운 협력입니다. 태풍으로 시설의 전력 생산에 차질이 생기는 재해가 발생했습니다. 산소를 담당하는 인공 광합성 장치인 나무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이기적인 마음이 여기저기 솟구칩니다.


이 시설이 만들어진 원래 목적인 인간의 건강한 유전자를 보관한 씨앗 탱크 가동을 멈추자고도 하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과 격리된 장애인들을 두고 우선순위를 논하기도 합니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쾌감기를 사용해야 하고, 그저 자신이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번엔 조슈가 수리를 해서 무사히 해결했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또다시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인간성이란 것도 미래가 있을 때나 찾는 거지. 이 판국에 인간성은 무슨." - 파라미터O


죽은 낸시가 갖고 있던 수신기의 신호를 따라 길을 떠난 조슈. 그곳에서 조슈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이미 작동을 멈춘 구형 기계종 하나와 하얀색 탄소 재질의 기계입니다. 시설에 있는 기계종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다가 말하는 것도 특이합니다. 작동을 멈춘 '친구'를 '추모'하는 로봇입니다. 자신을 이브라고 소개합니다.


이브의 존재는 미스터리입니다. 데이터를 살펴봐도 파라미터O 단어뿐입니다.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는지 정체와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이브는 구형 기계종들과는 달리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파라미터O는 이브에게 궁극적인 목적을 주입하는 변수입니다. 조슈는 이브에게 인간을 위해 일을 하도록 명령어를 넣습니다. 그렇게 이브는 잡다한 일을 하며 시설에서 머뭅니다. 그런데 이브는 확실히 다르긴 다릅니다. 자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최종 목적은 구형 기계종처럼 일에 맞춰져있지만, 그 과정이 꽤 유동적입니다. 꼭 인간 아이를 키우는 기분입니다. 게다가 외로움을 느끼는 듯 보이더니 스스로를 복제해 이브2, 이브3 … 자손을 생산하는 겁니다. 자손들마다 제각각 파라미터O를 달리 입력해서 발전대, 생산대, 정찰대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하며 시설은 한결 여유롭게 굴러갑니다.


이브는 인간을 '창조주'라고 인식합니다. 게다가 이브 외에도 이브의 형제 종족들이 더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도대체 이 신형 기계종을 만든 사람의 목적은 무엇인지 기계종의 비밀이 하나씩 풀리는 과정이 사피엔스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가는 것과 닮았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세대가 죽고 나면 사피엔스를 대체할 신인류가 될 것인지 흥미진진합니다. 소설 <파라미터O>는 로봇의 빅히스토리가 되는 셈이죠.


몇 안 남은 사람들 간에도 인간의 행동은 변하는 게 없어서 클라이맥스에 다다를수록 열불나는 상황의 연속입니다. 자멸을 앞당기는 이기적이고 불안정한 인간의 모습은 읽는 내내 씁쓸함을 안깁니다. 자의식을 가진 로봇이지만, 인간을 위해 일하는 존재로서의 목적을 가진 이브족은 이런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어떤 삶을 살아야 허비하지 않는 삶일까요. 허비한다는 말은 본래 목적에 맞지 않게 헛되이 쓴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애초에 삶의 본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 삶에 본래 목적이라는 게 정해져 있기는 한 걸까요. 대부분 밥벌이하느라 정신이 없는 삶을 살면서도 그 안에서 자기가 믿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정답일까요. 조슈의 고민은 자의식을 가진 기계종 이브와의 만남 이후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지난날은 사람다움에 대해 고민했다면, 이제는 로봇의 삶의 목적을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만 유지되는 사회라면 차라리 붕괴되어 마땅해." - 파라미터O 


<파라미터O>는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글쓰기를 하고 있는 이준영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입니다. 해외 고전 SF 소설 못지않은 스토리여서 한국 로봇 소설의 수준을 한층 올려놓은 작품으로 꼽을만한 소설로 앞으로도 입에 오르내릴 것 같습니다.


2020년은 '로봇'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여전히 소설과 영화 속에서만 자유로운 로봇이고, 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하는 이상 이브와 같은 기계종은 나오기 힘들 테지만 그래도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에는 로봇이라는 단어가 어떤 이미지일지 궁금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