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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 필요할 때 수필 한 편
오덕렬 지음 / 풍백미디어 / 2020년 10월
평점 :
아날로그적 감성이 물씬 나는 <힐링이 필요할 때 수필 한 편>. 진짜 수필을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펼쳐드세요.
언제부터인가 위로와 힐링 키워드를 내세운 에세이가 많았고 읽기도 많이 읽었더랬죠. 근데 그 감정이 정말 힐링이었을까? 힐링 된다니깐 힐링이 되고 있는 거겠지, 위로 에세이라고 하니깐 위로해 주고 있는가 보다 정도였다면, <힐링이 필요할 때 수필 한 편>을 읽으며 솔직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 이 감정을 어떻게 잊고 있었던 걸까?
잔잔하게 치유가 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힐링이 필요할 때 수필 한 편>. 평생 교직에 몸담은 교육자이자 수필가 오덕렬 저자는 수필의 문학성 회복에 앞장서며 수필의 현대 문학 이론화 운동을 펼치는 분입니다. 이 책 차기작으로 출간 예정이라는 <창작수필을 평하다> 책도 기대됩니다.
고향과 어머니, 삶의 지혜, 봄으로 상징되는 시작과 설렘, 말과 생각 그리고 수필에 관해 45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낯설고 몰랐던 단어여도 문장 속에서 어렴풋이 이해되는 소중한 우리말이 많이 담겨 있어요. '싸목싸목 십여 분쯤 걸었다', '서나서나 맘 먹어라'에서의 '싸목싸목'과 '서나서나'는 '천천히'라는 의미를 가진 향토어입니다. 현재 『전라방언 문학 용례사전』을 편찬 중이신 오덕렬 저자의 맛깔스러운 문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보릿고개를 겪고 천자문을 배우는 등 현대 도시 생활과는 다른, 우리 옛 문화와 생활의 에피소드를 간직하고 계신 저자인 만큼 요즘 세대가 읽으면 낯설만한 이야기일 겁니다. 고향집에 가면 넉넉해지는 마음 같은 건 이제는 그저 부모집 정도로 대체되었고, 마음이 힘들 때 찾던 고향집이라는 감성 역시 예전만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막연한 그리움 혹은 동경하게 되는 게 바로 고향집이라는 단어 아닐까요.
영화 워낭소리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 깊었습니다. 젊은 세대도 공감했던 영화였죠. 느리게 걷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앞만 보며 달리느라 지친 영혼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소중한 것, 근원적인 것을 놔두고 우리는 지금 정신없이 어디로 가고 있기에 느림의 미학에 끌리는 겁니다. <힐링이 필요할 때 수필 한 편>에 슬며시 빠져들며 공감하고 동감하는 이유 역시 같을 겁니다.
마지막 4부에서는 수필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문학의 장르로서 살아온 내력을 말하는 엣세의 관점에서 들려주는 방식이 재미있습니다. 몽테뉴에 의해 1580년에 태어난 엣세는 영국으로 건너가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때 주관적 소재에서 객관적 소재로 에세이의 진화도 일어납니다. 한국에서는 무명작가 이관희가 '창작문예수필'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붙여줍니다.
저자는 에세이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형식으로 반복해서 들려주는데, 그만큼 중요한 이유가 있더군요. 한국은 수필의 암흑시대라고 단언합니다. 아니, 누구나 다 쓰는 게 수필이 아니었던가요.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수필 쓰기 숙제도 했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오히려 수필 전성시대라 부르고 싶을 정도인데 말입니다.
저자는 비창작 일반산문을 써놓고도 창작문학이라고, 소설을 써놓고 수필이라 발표한다고 따끔하게 말합니다. 피천득의 「수필」은 원래 시이고, 「인연」은 원래 소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필로 공부했습니다. 창작수필의 문학성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청량하고 개운한 기분을 선사하는 수필집입니다. 고향을 잃은 세대에게 아날로그적 감성을 불어넣어 주고, 수필을 좋아하는 독자와 문학도에게 수필에 대한 진짜 역사를 만나게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