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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끝으로의 여행
루이 훼르디낭 쎌린느 지음, 이형식 옮김 / 최측의농간 / 2020년 5월
평점 :
프랑스 소설이어서 점잖고 고상한 분위기로 전개될 거라 생각했던 기대감은 와장창. 리얼하게 투박한 문장의 나열의 연속입니다. 기대 이상으로 더 재밌게 읽히더라고요.
프랑스 의사이자 작가 루이-훼르디낭 쎌린느의 실존적 경험이 반영된 문제적 데뷔작 <밤 끝으로의 여행>.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걸작으로 꼽히지만, 국내엔 아는 사람만 안다는 그 작품입니다.
출간 당시 하층민들의 구어체 프랑스어로 적나라하게 세태묘사를 해 당대 문학계에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고, 공쿠르상 후보에도 올랐던 작품인데 수상에 불발하자 오히려 더 큰 주목을 받을 정도로 핫했던 소설이라고 합니다.
사고의 흐름이 무척 가파르게 진행되는 편입니다. 예전에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갱부>를 읽으면서 의식의 흐름 전환이 꽤 길게 고스란히 느껴져 흥미로웠는데, <밤 끝으로의 여행>은 더 정신없이 몰아칩니다. 자서전적 소설이어서 그런지 더 생생한 느낌입니다. 순간 번역이 잘 안된 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 문장들도 있었는데, 절판된 이 소설을 최측의농간에서 새롭게 발간하면서 가능한 한 원문에 가깝게 번역했다고 해요. 특유의 호흡, 기질, 시각 등을 반영하는 특이한 어순을 사용한 작가라고 하니 이해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훼르디낭 바르다뮈는 스무 살에 입영합니다. 친구와 카페에서 얘기 나누다가 나름 열정의 치기로 저지르죠.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의 행동을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후회합니다. "한번 그곳에 끌려 들어가면 속수무책이다."며 "전쟁이란 한마디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총질하는 독일인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싶고, 멀리 달아나버리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훼르디낭 바르다뮈. 그 자리에 있는 대신 감옥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앞에 있던 연대장은 포탄 한 방에 고깃덩이가 됩니다.
적보다 동지들이 더 지독하게 느껴집니다. 빌어먹을 인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언제나 인간들, 오직 그들만을 두려워해야 한다."며 전쟁의 적나라한 실상을 목격할수록 인간의 광기를 발견합니다.
전장에서 낙오병으로 만난 로뱅송과는 끈질긴 인연이 이어집니다. 친구처럼 우정을 나누다가도 거리를 두며 멀어지기도 하고 그럽니다. 훼르디낭 바르다뮈가 아프리카 식민지와 미국을 거쳐 다시 유럽에 올 때까지 로뱅송과의 재회는 계속 이뤄집니다. 로뱅송은 바르다뮈의 분신과도 같기에 가능한 인연이었습니다. 각자의 선택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어느 지점에서 꼭 재회하는 그들을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만 해봅니다.
전쟁, 아프리카 식민지, 미국과 파리의 빈민촌 등을 경험한 바르다뮈는 억압과 부조리의 굴레에 묶인 삶을 사는 인간의 모습을 <밤 끝으로의 여행>에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 끝을 향해 여행을 감행하는 인간을요. 하지만 밤의 끝은 희망찬 아침이 아닌 회색의 아침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생이라는 블랙코미디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자조하게 됩니다.
위선과 부조리 속에서 분노하고 냉소하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지만, 그의 목소리가 그저 허공에 외치는 말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됩니다. "가장 큰 패배는 결국 망각하는 것"이라며 날 것 그대로의 단어로 할 말 다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바르다뮈의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가난이 무자비하고 철두철미하게 이타주의를 못살게 굴며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친절하고 자발적인 행동도 냉혹하게 벌을 받던 시절이었다." - 밤 끝으로의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