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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천천히 안녕
나카지마 교코 지음, 이수미 옮김 / 엔케이컨텐츠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알츠하이머 인지증(치매)를 앓는 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 평소 자신의 시나리오만 고집했던 나카노 료타 감독이 오리지널을 포기하면서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원작의 감동이 대단했기 때문일 겁니다.
「작은 집」으로 제143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이 소설도 야마다 요지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어요) 나카지마 교코 작가의 소설 <조금씩, 천천히 안녕>. 영화와는 또 다른 깊이의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고 착각하는 일이 잦아지더니, 친구들 모임에 가려고 나갔다가 장소를 모르게 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아버지 쇼헤이는 초기 알츠하이머형 인지증을 진단받았습니다. 진행을 멈추거나 완치는 불가능한 인지증. 다만 늦추는 수준으로 약을 처방받아 복용 중입니다.
알츠하이머형 치매는 인지 기능 장애를 보입니다. 언제부터 증상이 시작되었는지 그 시점을 정확히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서서히 시작되고 진행됩니다. 초기에는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다가도 옛 기억은 또렷이 기억합니다. 하지만 위엄이 감돌던 중학교 교장 선생님의 모습은 점점 흐트러집니다.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땐 생각지도 못한 난제에 부딪히곤 한다." - 조금씩, 천천히 안녕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는 상태로 3년을 무사히 지내던 어느 날, 늦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아내 요코는 애가 탑니다. 아버지의 생신 선물이라며 딸들이 사 준 휴대폰의 GPS 기능을 켜고 위치를 확인해보니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엉뚱한 곳으로 가는 쇼헤이. 스스로도 정신 차리고 보니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래도 제법 대화가 잘 통할 때도 있습니다. 아는 단어가 기억중추를 자극해 자기가 잘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만들다 보니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완벽한 맞장구 실력을 뽐내며 대화를 하는 쇼헤이의 모습을 보면 아이러니합니다. 하지만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쇼헤이의 증상은 기억 장애를 넘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다양한 영역에서 장애를 보입니다.
이젠 의미 있는 말을 하는 경우가 적어진 쇼헤이. 아내 없이는 화장실도 못 가고 식사도 못합니다. 쇼헤이를 돌보는 사람은 역시 고령자인 아내 요코. 힘에 부쳐 나가떨어지는 나날의 연속이다 보니 요코도 결국 탈이 나 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세 딸이 있지만 첫째 딸은 미국에 있고, 그나마 자주 기댈 수 있었던 둘째 딸은 늦은 임신을 한 상태이고, 막내딸은 미혼이지만 일 때문에 바빠 진득하게 도와줄 가족은 없습니다.
쇼헤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 보니 딸들은 그들 나름대로 복잡합니다. 돌보겠다고 선뜻 말하지 못해 자괴감이 듭니다. 하루 잠깐 아버지를 돌보는데도 피폐해지니 그동안 힘든 세월을 보낸 어머니가 대단해 보입니다.
아내의 이름도 잊고, 세 딸을 키웠다는 사실도 잊었을 듯한 쇼헤이. 언어도, 기억도, 지성도 잃은 쇼헤이를 돌보며 그들은 조금씩, 천천히 이별을 하는 10년의 시간을 보냅니다.
나카지마 교코 작가의 위트를 머금은 에피소드들 덕분에 마냥 암울하고 슬픈 분위기는 아니에요. 치매 증상 진행 과정에 맞춰 현실의 가족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존재를 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고, 간병하는 가족에게 동정심도 생깁니다. 그런데 아내 요코의 한 마디가 자극을 주더라고요. "네, 남편은 나를 잊었어요. 그게 무슨 대수라고."
치매 환자를 간병하는 생활은 슬픔과 고통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아버지의 사라진 기억은 가족들이 꺼내 그 소중한 기쁨을 만끽하기도 합니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일이기에 더 생생하게 담겼습니다. 10년의 긴 이별을 다룬 이야기의 결말은 저릿하면서도 뭉클한 여운이 무척 오래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