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야나부 아키라 지음, 김옥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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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개인, 근대, 미, 연애, 존재, 자연, 권리, 자유, 그 (그녀) 같은 단어들은 옛날부터 있었던 단어가 아닙니다. 번역어입니다. 언제 어떻게 이런 단어들이 생겨난 것일까요.


일본 번역어 연구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인 야나부 아키라의 책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는 일본의 번역어 성립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지만, 일본의 영향을 받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익숙한 '사회'라는 단어는 society의 번역어입니다. 교제, 세간과 같은 기존에 있었던 단어는 society의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목적의식을 갖고 모인 사람들의 집합, 좁은 범위의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말로만 표현되었던 '사회'. 무엇보다도 당시 society에 대응하는 현실이 없었습니다.


일본은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쏟아지는 낯선 개념어들을 일컫는 단어를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평소 일상어에서는 그런 단어가 없었습니다.


'개인'으로 번역된 individual은 단어의 뜻조차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일상어를 번역어로 쓰기엔 한계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혼자', '사람'으로 번역되기도 했었다가, 이후 일개인으로 번역되었고 지금의 '개인'으로 남았습니다.


평이한 일상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새롭고 이질적인 사상. 표현하기 어려운 의미는 한자어에 결국 떠넘기게 됩니다. 현재 우리가 쓰는 말 중 한자어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사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클수록 낯선 단어에 앞날을 맡겨버리는 겁니다.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는 단어가 단어 차원만이 아니라 학문, 사상, 문화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라는 걸 보여주는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modern은 번역어 '근대'를 탄생시킵니다. 초기에는 '근세'가 많이 쓰였지만, 근세를 대신해 시대 구분의 용어로 지위를 차지합니다. 여전히 근세와 근대의 차이가 모호하지만, 의미가 불충분한 상태로 존재했다가 점차 적절한 의미를 획득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beauty의 번역어 '미'는 서구의 관념론 미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전히 신비주의로 남아있는 미. 소설을 통해 쓰인 '미'를 살펴보면 정체 모호한 탓에 오히려 더욱 끌리고, 어딘가에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끼는 트릭 단어라는 걸 알게 됩니다.


번역어는 선진 문명을 배경으로 한 품위 있는 외래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상어에 비해 존재감이 좀 더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것처럼 막연히 느껴지기도 했죠. 하지만 일단 단어가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그 단어의 뜻이 명확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법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카세트 효과'라고 부르는데, 번역어에 특히 이런 경향이 나타납니다. 분명한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만 같은 겁니다.


중국의 한자문화를 받아들인 것처럼, 근대 이후 서구의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한자의 명사형을 끌어온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일본어에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흔히 쓰이지는 않았다가 번역을 통해 변화된 '존재' being처럼 순수 일본어는 경시한 사례로 등장합니다.


nature의 번역어 '자연', right의 '권리', feedom의 '자유', he와 she의 '그', '그녀'처럼 전통적인 의미가 변화되어 모순이 일어나는데도 모순을 덮어버릴 만한 새로운 의미로 정착된 단어들도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두루뭉술하게 써 온 단어들의 이면을 엿본 기분입니다. 서구의 사상을 받아들일 때 자칫 빠져들기 쉬운 사고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번역어의 탄생 비밀,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 우리의 사고가 번역어를 통해 변화하는 걸 보면 단어 하나하나가 짊어진 무게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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