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겨진 눈 아래에 - 브릿G 단편 프로젝트
정도경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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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공포, SF 등 다양한 장르 속에서 펼쳐낸 여성들의 목소리 《감겨진 눈 아래에》. 중세를 떠올릴만한 과거에서부터 근미래까지 다채로운 배경 속에서 사회가 억압한 여성들의 서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었고, 압도적인 분량만큼이나 가장 큰 충격적인 스토리를 전개한 전혜진 작가의 글이 표제작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눈에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 없는 물건이었다. - 황금비파_정도경

정도경 작가의 단편 <황금비파>는 '재수 없는 여자'라는 소재를 그렸습니다. 풍랑을 만나자 여자를 제물로 바친 뱃사람들. 처음엔 비파를 켜는 여인을 두고 모두가 즐거워했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는 가장 먼저 버렸습니다. 호수 속 세상은 물 밖의 세상에서 버려진 여자들이 가득합니다. 사악한 호수의 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픈 버려진 여자들. 비파 켜는 여인이 기지를 발휘해 그들은 고향이라 부르는 곳으로 돌아가지만...

 

엄마도 인간이야, 엄마도 인간이란 말이야. - 망선요_김인정

조선시대 실존 인물 허난설헌의 이야기와 저소득층 가정에서 버려진 아이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혼재된 김인정 작가의 <망선요>. 정신병원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집요하면서도 우왕좌왕하는 말들이 읽는 내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아무리 쓰고 또 써도 자신의 꿈이 닿질 않던 현실에서 살다 요절한 허난설헌,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어 심신이 망가졌던 시절의 엄마.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갇힌 여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마존 몰리는 종 전체가 암컷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수컷 아마존 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 아마존 몰리_이산화

이성적인 과학자들의 이상한 믿음들을 파헤치는 과학 잡지 기자. 그중 어느 생명과학자의 인터뷰는 특히 잊지 못할 에피소드입니다. 길 가던 여성을 폭행하려다 시민들에게 제압당한 생명과학자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인간 단성생식을 연구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아마존 몰리>. 의문이 많이 남는 소재이긴 했지만 상상력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여기가 어디니? 너 누구니? 내가 알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 폐선로의 명숙 씨_양원영

가부장적 집안의 엄마와 딸의 이야기 <폐선로의 명숙 씨>.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악몽을 꾸는 엄마와 딸. 문제는 악몽을 꾼 엄마가 전혀 다른 말투와 표정으로 딸을 낯선 이를 보듯 대한다는 겁니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도 젊은 시절 기찻길에서 겪은 사건 전후로 나뉜 엄마의 단절. 딸의 입장에서 여자로서의 엄마와 나만의 엄마이기만을 욕망하는 마음이 충돌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줍니다.

 

나의 남편은, 악마였습니다. - 사형 집행인 비르길리아의 하루_유월

사형을 선고받은 백작부인. 죽음에 대한 공포와는 다른 무언가를 가져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을 한 사형 집행인 비르길리아. 남편을 죽인 죄로 곧 사형에 처해질 백작부인의 사연을 듣게 되는데. 폭력적인 남편을 결국 죽였다는 흔한 스토리로 끝낸다면 그게 더 뻔하겠죠. 사형 집행인 비르길리아의 관점에서 독자에게 의문을 던지는 스토리가 인상적입니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너는 혼란에 빠졌다. - 애귀_김이삭

탈북자 여자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애귀>. 탈북 후 한국에서 만난 남자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임신한 채 버림받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자의 기구한 인생살이. 제목 애귀는 갈 곳 없는 귀신을 뜻합니다. 애귀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자의 삶, 그 여자의 곁에 선 애귀가 절묘하게 어우러집니다.

 

우리는 국가의 가축이었다. - 감겨진 눈 아래에_전혜진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한국판처럼 느껴진 전혜진 작가의 <감겨진 눈 아래에>. 읽는 내내 기가 막히는 분노가 화라락.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구시대적 사고방식으로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인격체라고 말하면 페미니스트냐 빈정거리고, 며느리는 시집간 집안에서 가장 미천한 사람이 되는 시대를 겪는 여자들. 하지만 더 이상해졌습니다.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감겨진 눈 아래에>는 국가가 만들어낸 매음굴에 갇힌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병역 의무와 임신 의무가 합쳐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 그 이상의 시스템이지만 왜, 어찌하여 그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까요.

 

 

 

가부장적 사회의 패악과 변질이 낳은 세상 속에서 사는 여성들의 목소리 《감겨진 눈 아래에》. 이런 공감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안타까운 결말도 있었고 시원스러운 결말도 있었지만, 그 후련함 역시 찝찝한 무언가를 안고 있습니다.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게 아닌가 하는 암묵적인 비극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어서이지 않을까요.

 

저마다의 캐릭터를 가진 여성들이 등장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이 책은 소설 플랫폼 브릿G 프로젝트의 가치를 충분히 활용한 결과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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