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의 천재들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찰스 다윈에서 당신과 나에게로 이어지는 미루기의 역사
앤드루 산텔라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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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가 사라져감. 넌 망하는 중. - 책 속에서

 

나약한 인간, 시간 낭비하는 인간, 업신여겨도 될 만한 인간 등 비난의 평가를 받는 '미루는' 사람. 그런데 남이 미루는 건 못 봐줘도 자신이 미루는 건 합리화하는 게 바로 '미루기'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 중요한 일을 미루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저널리스트 앤드루 산텔라 저자의 <미루기의 천재들>. 이제는 하나의 하위 학문으로 자리 잡을 정도로 미루기에 관한 관심이 높고, 미루는 습관을 극복하게끔 하는 자기계발서도 많습니다. 미루기는 근절해야 할 악습관일까요.

 

 

 

저자는 미루기 습관을 버리고자 하는 관심으로 미루기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게 아니라, 미루기 습관에 관한 명분과 근거를 찾고자 합니다. 재미있게도 미루기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 여정 속엔 우리가 익히 아는 거장들의 모습이 속속 드러납니다. 미루는 사람은 루저로 평가받는다는데 그들은 왜 성공한 사람으로 대접받을까요. 미루기 이면에 담긴 미루기의 속사정을 <미루기의 천재들>에서 만나보세요.

 

1838년 '모든 종은 변화한다.'는 문장을 노트에 적은 다윈은 과학에 일대 혁명을 일으킬만한 사건임을 인지하면서도 20년이 지난 후에야 진화론을 발표합니다. 출간 전까지 다윈은 무척 바빴습니다. 따개비와 지렁이에 푹 빠졌으니까요. 도로시 파커는 초고를 내기까지 걸린 오랜 시간의 변명으로 "다른 사람이 제 연필을 쓰고 있었거든요."라고 말했고, 노벨수상학자 조지 애컬로프는 8개월 동안 소포를 부치지 못한 변명으로 "내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미루기는 단순한 시간 지연을 넘어 상황이 악화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일을 지연하는 겁니다. 불편하면서도 가짜 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미루기.

 

현대 인지 행동 치료의 선조인 심리학자 엘리스의 책 <미루는 습관 극복하기>, 미루기에 관해 다작 작가인 페라리 교수와의 만남에서 미루는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한 이야기도 꽤 솔깃합니다. 무능한 인간이 되기보다는 노력을 안 하는 인간이 오히려 낫다는 식의 원인이자 변명이 되는 미루기.

 

미루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시작한 일을 끝내지 못하는 부류와 애초에 시작을 못 하는 부류. "스스로에 대한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일을 미루는 건지도 모른다"는 말은 특히 공감되었는데, 제가 평소 일정 짜는 기준이 이와 비슷합니다. 일정을 맞추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거절하고 포기하고 시작조차 하지 않은 일들이 수두룩한데 그것 때문에 인생의 또 다른 기회를 얼마나 놓쳤을까요.

 

 

 

<궁극의 리스트>란 책을 쓸 정도로 리스트에 집착한 움베르토 에코, 자기계발 산업의 기원이 된 벤저민 프랭클린, 막대한 과제를 쉴 틈 없이 설정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리스트 에피소드는 현대인의 할일 리스트(To-Do List)에 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미루기의 달인들에게 리스트는 리스트 작성만으로 이미 하나의 성취를 이룬 것이고, 마지막 항목에 줄을 긋는 것이야말로 힘 빠지는 일입니다.

 

 

 

 

스스로를 방해하는 미스터리한 행동, 미루기. 일과 시간과 생산성에 대해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며 현대 표준화 관리법의 선조가 된 테일러의 주장은 기계와 같은 효율성을 강조하며 과학이 되었습니다. 시간을 소중한 자원처럼 활용하기에 미루는 습관이야말로 성공의 방해물이 됩니다.

 

이런 역사의 흔적을 보며 저자의 한 마디. "스케줄이 강제되면 선택지도 제한된다". 세상과 세상이 요구하는 일을 미루는 거장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저자는 의무로 가득 찬 일상 세계에서 미루기야말로 길을 찾는 방법이 되지 않겠냐는 말이 인상 깊습니다.

 

 

 

유럽 계몽주의 시대의 슈퍼스타 지식인 리히텐베르크. 광범위한 지적 호기심은 이 일 저 일에 조금씩 손을 대게 했지만, 고집스럽게 몰두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리히텐베르크의 정신을 기린 리히텐베르크 소사이어티의 이야기는 더 재밌습니다. 단체 회원들에게 있어 꾸물거리기와 미루기, 주저하기는 창의적인 과정의 한 단계라는 걸 깨닫습니다. 한 가지 일을 미루면 종종 다른 일을 하게 되고,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던 그 두 번째 일이 결국은 꼭 해야 했던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일 경우가 많았던 겁니다.

 

모든 미루기 달인들이 천재적 업적을 남겼다는 명제가 아닌, 천재적 업적을 남긴 이들도 미루는 습관의 흔적이 있었다는 정도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는 합리화에 딱입니다. 라이트의 건축물 폴링워터가 있는 펜실베니아, 리히텐베르크의 고향 괴팅겐, 찰스 다윈의 다운하우스 등을 순례하며 일을 미루는 사람은 한 가지 일에서 등을 돌려 다른 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차츰차츰, 조금씩 진행될 뿐이라는 건 그저 게으름 피우는 것과는 다릅니다.

 

미루는 습관이 집중을 방해하는 외부적 자극이 많은 현대에 생긴 증상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는 걸 보여준 <미루기의 천재들>. 누군가에겐 골칫거리이자 은밀한 기쁨이 되는 미루기. 미루는 습관을 떨쳐내고 싶지만 단호하게 근절할 의지가 없는 미루기 달인들에게는 유쾌하고 재치 있는 이야기입니다. 원제도 맘에 쏙 듭니다.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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