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전셋값 생각에 시달리다가 신랑이 퇴근하고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우리는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그 이상을 요구하면 과감히 이사를 가기로 정했다. 나는 아무래도 흥분해서 바들바들 떨다가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전화를 끊은 후에 이렇게 말할걸, 저렇게 말할걸 후회할 것 같아서 늘 차분함을 유지하는 신랑이 전화를 걸었다.

 

핑퐁처럼 왔다갔다 하는 대화들. 아무래도 집주인은 2천을 생각하고 3천을 부른 것 같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얘기했지만, 집주인은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살고 싶어도 돈이 없는걸요.

 

협상결렬. 주인은 2천을 안 올려주면 집을 내놓는 수밖에 없다며 1층 부동산에 열쇠를 맡기라고 했다. 그리고 곧바로 집을 보고 싶다고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밥을 황급히 먹고 치우고 있는데 벨소리가 들렸다.

 

인상 좋은 부동산 아줌마와는 낮에 잠깐 이야기를 나눈 터였다. 우리가 가진 돈이면 우리 두 사람 살 집은 많이 있다고, 주인아줌마하고 얘기 잘해보라고 하셨었는데.

 

아줌마가 집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다시 신랑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달세요?

 

반전세로 돌릴 생각은 없냐는 말이었나보다. 당근, 우리는 그럴 생각이 없음을 밝혔고 다시 전화는 끊겼다. 부동산 아줌마는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집 빨리 나가게 하고 살 집을 구해보자고 했다. 우리는 이 집에 들어올 때 냈던 전세금 선에서 집을 구해달라고 당부했다.

 

아주머니가 내려가시고 지인에게 전화가 와서 통화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신랑이 방으로 쑤욱 들어오더니 입모양으로 "천 달래, 천!" 이러는 거 아닌가.

 

주인아주머니가 다시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천 정도 올리는 건 어떻겠느냐?"고 부동산아줌마에게 의향을 물어본 모양이다. 부동산 아줌마는 보통 집을 옮길 때 지금보다 더 나은 금액을 주고 집을 찾는데 같은 금액으로 찾는 걸 보니 여유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어차피 이사 나가고 이사 오면 서로가 돈만 드는데 이왕이면 천 정도로 서로가 합의를 보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셨단다.

 

그러고는 주인아주머니가 우리 신랑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얼마면 괜찮겠냐고.

 

결국 주인아줌마는 신랑에게 몇 살이냐고 묻더니 "서른넷이요"라는 말에 "아이고, 우리 아들이 서른셋이다" 하시고는 천에 합의를 보셨다고 한다. 아들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말씀이셨겠지.

 

그 짧은 시간에 참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만약 우리가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과감히 나가기로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작년에 한 중소기업에서 번역거리를 맡은 적이 있다. 적정선에서 단가를 정하고 집에 와서 한 장 번역을 해봤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거다. 아, 이 가격에는 도저히 할 수 없으니 만약 내가 원하는 가격에 맞춰주지 않으면 그냥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전화를 했다. 억울한 마음으로 꾸역꾸역하는 것보다는 요구한 만큼 받으면서 성실하고 싶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못 맞춰주겠다면 진짜로 안 할 생각이었는데, 상대방은 순순히 내가 원한 선에 금액을 맞춰주었다. 이것이 밀당이고, 협상의 법칙이란 걸 그때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원하는 선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느니 그냥 포기하겠다.

 

이런 마음. 처음부터 협상의 여지가 없는 사람에게야 안 통하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할 때 비로소 그것이 내게 주어진다, 는 게 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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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4-03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전세를 저렇게... 올려 달라 말하는 것은 참... 거시기합니다. 슬프네요.

시골에서는 천만 원이면 집 한채를 사거든요. 시골 집 한 채란 적어도 마당 텃밭이
50~70평쯤 있는 집이지요.

뒷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 집임자라 하는 분이
당신 아들 나이 때문에 집 계약을 해 주었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다른 까닭이 있겠지요.

아무튼......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이사를 가건 안 가건
가장 마음이 느긋하면서 좋을 만한 집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요.
그것 하나뿐입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13-04-04 02:03   좋아요 0 | URL
큰돈일수록 통장에 찍힌 숫자에 불과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시장에서 부추 한 단, 양파 한 망 사면서 만 원을 주고 거스름돈을 받을 때가
어쩌면 돈을 실감하는 가장 큰 순간일지도 모르겠어요.

시골에선 천만 원으로 집을 살 수 있군요.
우린 같은 하늘 아래 사는데,
같은 돈을 갖고 경험할 수 있는 크기가 다르네요.
슬픈 현실이죠.

2년 만에 집을 옮긴다는 게 떠돌기 싫어하는 저로선 엄청난 부담감이었는데
그래도 한동안은 정 붙인 곳에서 계속 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기쁘네요 :)

이진 2013-04-05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님 마음님 마음님 마음님!!
얼마만이어요, 이게. 깜빡 잊었다 싶을때마다 찾아오셔선 저를 일깨워주시니.
댓글을 휴대폰으로 확인하고 한달음에 달려가려고 했으나 아이참, 이거 컴퓨터를 할 시간이 없네요. 더 자세히는 알라딘을 할 시간. 사월 들어선 이제 글 쓰고 책 읽기만 하려구요. 지켜질는지... 두고봐야 겠지만.
추천에서 이제 공감으로 바뀌었는데, 어떤 이웃에게는 추천을 주고 싶었고, 또 어떤 이웃에게는 공감을 주고 싶었던 저로선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하고 그래요. 마음님께는요 항상 공감을 하고 싶었지요. 그래서 좋아요. 마음님! 발길이 늦었지요. 안녕히 주무시고, 오늘 날이 밝으면 또 행복한 하루 되시길.

마음을데려가는人 2013-04-05 16:24   좋아요 0 | URL
아웅, 풋풋한 이진님. 제가 뭔가를 할 땐 팍 하고 안 할 땐 또 아예 안 하는 성격이라 한동안 또 알라딘에 들어오질 못했어요. 여전히 방황중이기도 하고요. 헤헤헤헤.
사월에는 본격적으로 읽고 쓸 생각인가봐요. 저도 한동안 뱉어내지 않고 지냈더니 뱉어낼 게 많이 생기더라고요. 이진님께도 사월은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아서 숙성시키고 좋은 것을 골라내게 하는, 그런 달이 될 것 같아요. 이진님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하네요. 공감하는 이웃이 있다는 것도 해피하고요. 숙성의 시간 잘 보내시고 더 좋은 얘기들 많이 들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