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카페의 매니저로 스카웃된 친구와 에스프레소 기계 영업을 하는 친구를 소개시켜줬다. 친구의 한가로운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둘의 대화를 듣는다. 커피에 관한 얘기는 대부분 아는 얘기지만, 기계에 관한 얘기는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예전부터 카페를 하나 차리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건 나였고, 기계 영업을 하는 그 친구였는데, 정작 커피에 그닥 관심도 없던 친구가 별다방에서 일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한 가게를 책임지는 매니저까지 돼 있었다, 후훗. 인생은 알 수 없는 거다.
대한민국에 커피열풍이 불면서 주변사람들이 하나둘 커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더니, 미술을 가르치던 시누이가 카페를 열었다. 옆에서 지켜보자니 카페란 돈을 벌기 위해 하기엔 좀 버거운 업종이었고, 인건비를 아끼려면 내 하루를 전부 저당잡혀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내 시간을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는 나는, 온종일 가게 안에 처박혀 있으며 떼돈도 못 버는 '카페사장'에 흥미를 잃어갔다. 허풍처럼 부풀었던 내 소망은 천천히 사그라져갔다.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아주 작게나마 남아 있던 내 꿈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버렸음을 확인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아타미의 고목을 떠올렸다.
예전에 일하던 출판사에서 동료들의 동의만 얻어 내 맘대로 가져온 책이 있었다. <세계의 나무>라는 화보집에 가까운 책이었다. 그 속에 실린 바오밥나무가 너무 황홀해서, 언젠가 마다가스카르에 가서 바오밥나무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간절히 바라곤 했었다.
친정집에 갔다가 그 책을 가져왔다. 역시 책에 실린 나무들은 너무도 아름답고, 오래되고, 경이로웠다. 그런데 낯익은 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지명을 살펴보니 일본의 '아타미'였다.
아타미는 2년 전 결혼기념일을 맞아 갔다온 일본의 온천관광지였다. 과거에는 엄청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점점 쇠퇴해가는, 주로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잔뜩 기대를 안고 도착한 호텔은 흡연이 가능한 방을 택한 탓에 담배냄새에 쩔어 있었고, 창을 열자 베란다에는 비둘기똥이 덕지덕지 뭍어 있었다. 당장 다시 짐을 싸서 돌아가고 싶을 만큼, 그곳은 후졌더랬다.
추락하는 마음을 붙들고 서서히 주변을 즐길 줄 알게 되었을 즈음,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이 오래된 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거대한 고목의 위엄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분명 이 책을 보면서 <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섬 '야쿠시마'에 가서 2천 년이 넘은 나무들의 향연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이 고목은 '야쿠시마'의 나무들 중 하나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마 그 사이 기억은 왜곡되어졌을 것이다. 아타미란 이름은 생소하고, 그 나무는 인상적이고... 인상적인 나무 사진과 <원령공주>의 배경이 되는 섬이 서로 화살표를 그리며 나의 기억속에 저장되었겠지.
그냥 농담처럼, 하지만 진지하게 꾸었던 꿈. 이렇게 모르는 사이에 이뤄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구나 싶어 가벼운 희망 하나가 피어올랐다. 마다가스카르에 가서 바오밥나무를 보겠다고 떠들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 내가 소원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을 때쯤, 아주 적당한 때에 그곳에 가볼 수도 있겠구나. 꿈꾸는 건 좋은 거구나.
어느 순간 꿈조차 꾸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아무 제약없이, 아주 즉흥적으로, 두근거리는 설레임을 안고 ".........할 거야"라고 당차게 내뱉던 생기있는 아가씨는 어디로 갔나. 심지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다시 꿈을 꿔야겠다. 이루기 위해서 꾸는 것이 아니다. 꿈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상상하며 갖게 되는 설레임을 불러일으키고자 함이다. 그것에서 오는 에너지를 내 것으로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