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8시 50분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엔 오만가지 생각이 떠다니고 있었다.
할 말은 하는 소비자인 나는,
-아무리 그래도 당일배송인데 최소한 익일에는 배송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요?
-택배 아저씨 전화번호가 있으면 뭘해요, 통화가 되질 않는데
등등 기다려도 오지 않는 택배에 대한 불만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갑자기 읽고 싶은 책이 있을 땐,
서점에 나가 책을 골라오는 일보다
알라딘의 당일배송이 좋다,
요즘같이 추운 겨울엔 더더욱.
'당일배송'이란 말이 무색하게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날이 됐는데도 도착하지 않는 택배에 난 애가 달았다.
배송담당자는 전화를 해도 통화중이거나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기 일쑤.
전부터 찍어두었던 책은 출고가 31일에 된다고 해서
일부러 다른 책으로 골랐는데 말야.
아무리 연말이라도 최소한 오늘은 와야 되는 것 아냐!
밤 9시가 다 돼 가자 오늘도 책 읽긴 글렀구나 싶어
다음날 아침 당장 알라딘이든 택배회사든 전화해서 따져야지 단단히 마음먹고 있던 찰나.
탕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에이, 설마.
알 수 없는 설레임.
아, 택배아저씨닷!
책을 받아든 기쁨에 마음속에 불던 매서운 칼바람은 잠잠해지고
작은 흥얼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금새 기분이 풀린 나는 신랑에게
"벌써 시간이 아홉 신데, 아직까지 배달을 하러 다니네? 고생이다 그치?"
헤헤헤 웃으며 포장을 뜯었다 그런데.
포장을 벗고 나온 책들에 손이 닿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찬 곳에 놓여 있었던지
책은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도 차가웠다.
옆에서 신랑이 말한다.
"그러게. 택배기사도 아직 학생인 거 같은데, 고생이 많네."
내가 수령자인 것을 확인하고도,
뭐가 그렇게 바쁜지 허둥지둥대며 바삐 발걸음을 돌린 청년의 뒷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추운 날씨에 하루종일 동분서주했을 그 사람의 하루가
책에서 전해지는 냉기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목이 빠져라 기다렸지만,
청년은 뛰고 또 뛰었을 하루.
과연 나는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배송지연을 탓할 자격이 있는가.
바빴던 그 사람의 하루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가끔은 정신이 버쩍 드는 차가움도 나쁘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