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본어능력시험을 보았다. 그간 4개월간에 걸친-공부는 안 하면서 괜히 스트레스만 받는-굴레에서 해방된 느낌이다. 야호! 앗싸라비야콜롬비야.
하지만 시험을 본 지가 너무 오래 돼서 그런지, 시험이 끝나도 홀가분할 때는 시험을 잘 봤을 때란 걸 까먹고 있었다.-_- 시험이 끝나자 헤갈렸던 문제들은 쿨하지 못하게, 머릿속을 맴돌며 나를 괴롭혔다. 쳇. 이보다 더 웃겼던 건 시험을 보는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내 머릿속에선 별별 쓸데없는 생각들이 맴돌았다는 거다. '이거 합격한다고 해도 실제 일본어 실력은 별볼일 없는데 나 이거 왜 보기로 했지?'에서부터 '왜 시험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는 거지? 아, 그래, 짧은 시간 안에 이 독해 지문을 얼마나 파악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거지? 근데, 근데 말이야. 우리가 평소 책 읽을 때 시간을 정해놓고 읽지는 않잖아? 이렇게 대~충 읽고 어설피 지문 파악해서 정답을 콕, 잘 찍으면, 그러면 그게 실력인가? 하긴, 자본주의 사회니까 무조건 짧은 시간에 최대한의 효율이면 만사 OK이다, 이거지.'까지. 이렇게 구시렁댈 거 나 시험 왜 본 거야?;ㅂ;
원래는 그 정도 공부하면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체크해 보고 싶어서 본 시험인데 틈틈이 준비하다보니 목적전치 현상이 일어났다. '공부를 위한 시험'이 '시험을 위한 공부'로 바뀌면서 나는 어느새 정답을 고르느냐 못 고르느냐에 집착하게 되었고 주로 지루한 암기식 공부가 이어졌다. 언어란 건 어떤 문맥 안에서 어떤 식으로 활용되는지를 자주 접해야 그 감각이 길러지는 건데, 매번 어제 외운 단어의 음과 뜻, 한자만 확인하고 있었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이왕 보는 시험이니 잘 보자며 12월 3일까지만 참자, 했는데. 시험이란 거 참 허무하구나 싶었다.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험이 '시험을 위한 지루한 공부'를 낳은 것처럼 사실은 우리의 형편 없는 진짜 실력을 감추기 위해, 시험을 이용해온 건 아닌지 씁쓸했다.
그냥 더디더라도, 가시적인 효과가 보이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 다시 일드도 보고 집에 사다놓고 읽지 않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원서들도 조금씩 꾸준히 읽고, 그러면서 진짜 실력자가 돼야지. 전체의 맥락을 볼 줄 아는, 감각이 있는 사람이 돼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