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초에 제주에 짧게 다녀온 후로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아 또 제주에 왔다. 지난 번 강의를 들었던 분들 중에 제주 지속가능발전위원회 분들이 강의 내용이 좋았다고, 전국 지속가능발전협의회 포럼에서 발제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일정으로 보면 도저히 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강의는 두 시간이지만, 이번 발표는 15분 내외의 시간이었다. 겨우 15분 발제하러 제주까지 가야 하다니! 하지만 이번에도 거절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이번만큼은 지난번처럼 그냥 바로 올라오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주말을 끼어서, 맘껏 놀지는 못하더라도, 조금 쉬다가 돌아오는 시간 정도는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일터에 양해를 구하고 하루 대체휴무를 쓰고, 토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을 잡았다. 일요일에 오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적어도 주말 하루는 아이들과 보내고 싶은 마음에 토요일 오후 늦게 돌아오는 일정을 잡았다.


목요일 오후 발제를 위해 점심때 비행기를 타야 하고, 다음날까지 주체측 포럼 일정에 모두 참여하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순전히 주체측에서 제공하는 숙식을 제공받기 위해서였다. 호텔 숙박과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아침과 점심까지 제공받았다. 게다가 금요일 오전 일정인 비양도 지질 트래킹에도 관심이 많았다. 여러모로 괜찮은 선택이었다.


세 가지가 계획과 어긋났다. 하나는 가능하면 빨리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제주도로 출발해서 좀 느긋하게 쉬다 오자는 생각이었지만, 절대 그렇게 될 리가 없다는 걸 계획할 때도 짐작하고 있었다. 오히려 출발 당일 오전 비행기 시간을 놓치기 직전까지 일에 매달렸음에도 꼭 마무리지어야 할 일을 세 개 정도 미뤄두고 출발했다.


덕분에 지하철을 갈아타는 내내 열심히 뛰어야 했고, 간신히 수속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두 번의 환승역에서 전력 질주에 가깝게 뛰어, 두 번 모두 승강장에 막 들어오는 열차를 간신히 탈 수 있었고, 덕분에 지하철 어플 계산보다 20여 분 이상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비행기가 출발 예정시간을 넘겨 갑자기 항공기 터미널로 돌아가더니 정비를 한다고 몇 십분을 가만히 기다려야 했다. 결국 이륙 시간을 보니 거의 1시간 늦게 출발했다. 마침 이날따라 좌석이 가운데 끼인 자리였고, 책이나 음악을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비행기를 정비하는 1시간 동안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걱정만 했다. 행사 시작 1시간 전에 도착하도록 비행기를 예약했다. 공항에서 멀지 않은 거리라, 점심을 먹고 행사장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이미 행사 시작 직전이었다. 배는 고팠지만, 택시타고 바로 행사장으로 가야 했다. 이것이 두번째 어긋난 일이다.


세번째는 옷차림이다. 뭘 입고 가야할지 고민을 좀 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표하는 것이라 정장을 입어야 하나 생각했는데, 문제는 정장 위에 입을 옷이 없었다. 파카는 너무 두꺼워 정장 위에 입기 불편하고, 어울리지도 않았다. 코트가 있긴 한데, 20년도 더 된 옛날 옷이라 너무 낡았고, 디자인도 좀 그랬다. 가을에 입을 만한 얇은 코트가 있긴 한데, 그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듯했다. 그냥 평상복 차림으로 갈 생각이었다. 지난 강의 때도 그냥 편하게 입고 갔었다. 물론 그땐 겨우 5명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전국에서 1백명 가까이 모이는 행사라고 하니 성격이 다르긴 했다.


마지막에 선택을 바꾼 건 전날 있었던 강의 전 설명 시간 때문이었다. 전날인 수요일 오후에 나는 김익중 교수님 강의 앞에 10분 가량 설명 시간을 얻어서 발표를 할 계획이었다. 보통 얻기 힘든 기회였고, 최대한 잘 활용해야 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잘 설명할 것인가만 고민했는데, 오전에 사무실을 방문한 이사님이 내 옷차림을 지적했다. 구청장을 비롯해 공무원들이 엄청 많이 오는 자리인데다, 공식적으로 조합을 대표해서 나가는 자리에는 옷차림을 신경써 달라는 요청이었다. 일리 있는 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장을 입었어야 했나 하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고 강연 장에 갔는데, 진짜 나를 제외한 청중 1백여명이 모두 정장 혹은 정장에 가까운아주 포멀한 옷을 입고 왔더라. 그제서야 몇 년 입어서 낡은 내 파카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다음날 아침 고민 끝에 정장을 입고 제주를 가기로 했다. 날씨 어플을 보니 서울보다는 훨씬 온도가 높더라. 제주는 그래도 따뜻한 남쪽 나라니까 괜찮을거야 싶었다. 반나절 서울에서 추운 것 쯤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제주에 와서도 계속 추웠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특히 오늘 비양도 일정은 흐린 날씨에 정말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다른 참가자들 모두 내 옷차림을 걱정했다. 다행히 그새 조금 친해진 한 분이 자신의 목도리를 내게 양보해 목과 얼굴 아랫쪽을 가렸더니 한결 견딜만했다. 사실 내복도 입었고, 겨울 정장이라 몸은 그리 춥지 않았지만, 강한 바람 때문에 목과 귀가 특히 시려웠다. 


이젠 이번 일정에서 좋았던 점들을 말해보자.


우선 인맥을 제법 넓혔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 덕에 전국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지난 내 강의를 들었던 제주 지속가능발전위 분들은 손님으로 온 나를 아주 잘 챙겨주셔서 무척 감사했고, 몇몇 지역에서 태양광에 관심이 많다고 특별히 말을 걸어온 분들과도 이틀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실 어제 점심도 못 먹고 저녁때까지 행사장에 있느라 무척 피곤하고 힘 빠졌지만, 저녁 식사하러 가서 맛있는 음식과 한라산 소주가 한 잔 들어가니 금방 또 활기를 되찾았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처음 만난 주위 분들과 대화를 나누며 술과 음식을 먹었다. 호텔방을 잡고 나서 다른 참가자들이 끼리끼리 2차를 가는 분위기였는데, 나도 슬쩍 낄까 말까 고민을 좀 했다. 끼어들려면 충분히 낄 수 있었지만, 이미 식사하면서 한라산 1병을 혼자 마신 것이 조금 부담이었고, 처음 만난 분들과의 술자리에서 완전 오버하곤 하는 내 성격 때문에 망설여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비양도 들어가는 배를 타야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오늘 아침에 다녀온 비양도는 정말 좋았다. 운이 정말 좋은 편이라고 했다. 어제만해도 배가 뜨지 못할 정도로 파도가 높았다고 한다. 오늘도 파도가 높아서 배가 정말 크게 흔들렸는데, 그때마다 여성들과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높았다. 바이킹을 타는 듯 심장이 철렁철렁 떨어지는 느낌을 1초마다 한 번씩 느꼈다. 암튼 비양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 생긴 화산섬이다. 고려시대에 터진 화산으로 역사서에 기록이 남아있다고 했다. 정말 신기한 걸 많이 봤다. 


잔뜩 흐린 날씨에 엄청난 바람이 끝없이 불어서 제법 추웠지만, 그래도 바다 색깔이 정말 예뻤다. 구름이 잔뜩 낀 어두운 하늘도 좋았다. 아마 서울이었다면 회색 도시의 회색 하늘이 좋을 리 없었겠지만, 제주여서 그리고 비양도여서 참 좋았다.


천천히 두 시간 가까이 걸으며 다음에 아이들과 놀러와야지 생각을 했다. 달리 같이 올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애들 생각부터 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사실 아이들은 이렇게 많이 걷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산을 오르내리는 것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급경사 지역이 몇 군데 있었는데, 아이들이라면 무서워서 꼼짝도 못하고 울음을 터뜨릴만한 곳이었다. 



비양도에는 한림초등학교 비양분교가 있는데, 전교생이 2명이다. 5학년 1명, 3학년 1명, 같은 집 아이들이다. 이 학교에는 분교장이자 담임선생님인 교사 1분과 행정교사 1분 이렇게 두 명의 선생님이 계시다. 학생 2명에 교사 2명인 학교. 학교가 아담하고 포근한 느낌으로 참 예뻤다.


비양봉을 내려와 배가 오기까지 시간을 보낸 찻집 주인이 이 두 학생의 엄마였다. 그리고 늦동이 막내가 현재 5살인데, 매일 제주도로 배를 타고 어린이집을 다닌다고 한다. 큰 아이가 분교를 졸업해도 막내가 학교에 들어갈 것이기에 또 학생은 2명으로 유지될 것이다.



비양도를 나와서 마지막으로 일행들과 맛있는 밥을 먹고 헤어졌다. 주최측에 불러주셔서 감사하고, 정말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고 진심을 담아 인사를 전했다.


이제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 제주에 아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모두 연락을 못하고 지낸지 너무 오래라 갑자기 전화하기가 좀 그랬다. 그냥 올레길이나 좀 걷고, 맛있는 걸 먹고, 근처 숙소에서 푹 쉬면서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여전히 강한 바람 때문에 걷기가 힘들었다. 어쩔수 없이 버스로 일정 구간을 이동했고, 그 동안 숙소를 예약했다. 중간에 내려 올레길을 찾아 걸었다. 한참 걷다 보니 해가 따뜻하게 등을 데워주기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강했지만, 그래도 견딜만 했다. 한참을 걷다가 바람 좀 피하고 가야겠다 맘 먹고 여기 커피숍에 들어와서 글을 쓴다.



 

이제 슬슬 나가서 숙소까지 좀 더 걷고, 숙소에 가방을 놓고, 저녁에 뭘 먹을지 좀 고민해야 겠다. 근데 점심때 잔뜩 먹은 탓에 아직도 배가 빵빵하다. 흠 숙소에서 푸쉬업이나 버피라도 좀 해야 저녁을 먹을 수 있을 듯하다.


덧) 어제 밤에 호텔에서 씻고 거울에 알몸을 비춰보고, 멋진 내 몸에 또 한번 반했다! 누군가 내게 어떻게 그런 표현을 쓰냐고 묻던데, 내 눈엔 내 몸이 너무 멋진데 어쩌란 말인가? 심지어 지난 3달 동안 어깨 통증으로 운동을 못 했음에도, 어제 저녁에도 잔뜩 먹어서 배가 꽉 차 있었음에도, 멋있었단 말이다. 물론 배가 꽉 차 있어서 평소보다는 복근이 안 보이긴 했다. (평소엔 제법 선명하게 보인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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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12-01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협재해변에서 바라보는 비양도 뭔가 신비로워 보였는데, 아직 비양도에 들어가보지는 못했네요
감은빛님 글 보니 비양도에 가고 싶어집니다

감은빛 2017-12-13 21:52   좋아요 0 | URL
바람이 무척 강한 날이었고, 날이 정말 추워서 덜덜 떨면서 보았는데,
정말 눈 돌리는 곳마다 예술작품이 따로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섬은 작지만,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chika 2017-12-02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양도에는 너무 오래전에 갔었던지라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갠적으로 아이들과 함께가는건 가파도 추천요. 학교도 이쁘고 간혹 개도 보이고 걷기에도 좋고. ^^;;
아, 화산섬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는 비양도가 좋을수도 있겠군요. 물론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모든곳을 다 가보는것이 좋겠지만. 우리네 삶의 환경이라는건. . . ㅠㅠ

감은빛 2017-12-13 21:55   좋아요 0 | URL
사실 지질 트래킹이라고 하나의 생태관광 상품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걸으니 재미있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가파도 추천 고맙습니다!
당장은 아이들과 움직이기 어려울 듯 한데,
그래도 1년에 한 두번은 여기저기 돌아다녀보고 싶어요.

그게 아이들에게도 저에게도 추억이자, 일상을 견디는 큰 힘이 되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