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쉬기를 바래


올해 지역에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중 휴식이 꼭 필요한 활동가 5명을 선정해 휴가비를 주는 이벤트가 있었다. 제목이 "제발 쉬기를 바래" 였다. 작년에는 2명을 선정했었다. 나와 친한 선배 두 명이 선정되어 제주도를 다녀왔던 것이 기억난다. 올해는 규모가 더 커졌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지역 활동가들 사이에서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여러차례 받았지만, 추천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을 추천하기가 어려웠다. 다들 바쁘고 힘들게 활동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그 중 누구 한 명을 선택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고, 또 왠지 나를 추천하고 싶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체면상 내가 나를 추천할 수는 없었다. 그냥 참여도 하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비염이 심해 꼭 참석했어야 할 컨퍼런스 폐막식에 못가고 뻗어있었던 날, 그 5명 중 한 명에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사전 추천을 받은 활동가들을 소개하고, 다시 현장 투표를 통해 다수를 얻은 5명을 뽑는 방식으로 선정했단다. 누가 나를 추천했으며, 누가 내게 표를 줬을까 궁금했다. 나중에 들으니 평소 가장 친했고,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는 선배 2명이 적극적으로 나를 추천하고, 홍보도 열심히 했다고 했다. 고마운 마음과 함께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과연 내가 저걸 받아도 될까? 물론 내가 열심히 활동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다들 그렇게 바쁘게 어렵게 힘들게 활동하지 않나?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평소 야근도 많이 하고, 늘 피곤한 모습을 보이고, 바쁜 척 돌아다닌 덕분에 표를 많이 받았던 걸까? 소식을 전해들은 이들로 부터 축하 인사를 계속 듣고 있는데, 기뻐야 할 일인데 계속 뭔가 마음이 불편하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미 7월 말에서 8월초까지 여름휴가를 다녀왔는데, 휴가비를 받아서 무슨 소용인가? 이사장님은 올해 연말까지 다시 휴가 일정을 정해보라고 하시는데, (지금까지도 계속 바빴지만) 이제 정말 바쁜 하반기 일정을 두고 과연 휴가를 또 쓸 수 있을까 싶다. 지금 드는 생각은 긴 추석 연휴 동안 저 휴가비로 부모님과 짧은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다. 한편으론 혼자 훌쩍 여행을 가고 싶기도 하고, 또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한데, 며칠 전 어머니께서 전화해서 추석 연휴에 우리 셋(부모님과 나) 어디 놀러 갔다 오면 어떠냐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실상 마음을 정했다.


아이들은 이번 추석에는 애들엄마와 처가에 머물 예정이다. 1년에 돌아오는 명절 둘 중에 설은 우리 집(그러니까 고향집)에서, 추석은 처가에서 보내기로 약속했었다.


지난 주 토요일에 행사가 있었는데, 일이 많아서 전날 금요일부터 밤새 일을 했다. 토요일 아침 같은 사무실을 쓰는 이웃 기업 사람들이 출근했는데, 내 모양새를 보더니 밤을 샜음을 짐작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일을 하냐고 한 마디씩 했다. 특히 한 친구는 "제발 쉬라고 휴가비도 받으셨는데, 이렇게 주말까지 밤새 일을 하시고, 잠도 못 주무시고 또 곧바로 행사 진행하러 나가시면 어쩌냐?" 라고 말했다. 그러게 "쉬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휴가비를 줄 게 아니라 실제로 일을 줄여줘야 쉴 수 있을거 아닌가? 쉬라고 해놓고 계속 일을 몰아주면 어떻게 쉬란 말인가?


요란했던 여름 휴가


여름 휴가를 다녀온 직후(그러니까 8월 초)부터 휴가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계속 짬을 내기 어려웠다. 가끔 시간이 날 때가 없지 않았지만, 그럴 때는 또 글을 쓰기가 싫었다. 그때 바로 썼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길게 썼겠지만, 이제 한 달이 훌쩍 지난 시점에서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으려니 별로 흥이 나지 않는다. 간단히 생각나는 것들만 적어보자.


** 대중교통으로 여행하기 어려워 **


늘 여름휴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갔지만, 올해는 다른 곳에서 이삼일 놀다가 부산으로 갈 생각이었다. 어디를 갈지를 두고 계속 고민하다가 삼척으로 정하고 고속버스를 예약한 것이 휴가 떠나기 이삼일쯤 전이었다. 


점심때쯤 아이들을 데리고 강변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배가 고팠다. 애들은 아침을 늦게 먹어 배가 고프지 않다고 음료수를 사달라고 했다. 애들에게 쥬스를 하나씩 사주고, 난 포장마차에서 콩국수를 빨리 먹었다. 국수를 먹는 중에 큰 아이가 자꾸 자기 아이스티가 맛이 이상하다고 못 먹겠다고 투덜거렸다. 내가 먹어보니 맛과 향이 독특했다. 시간이 없었지만, 아이가 하루종일 짜증내는 걸 보기 싫어서, 주문한 아이스티를 그냥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가게로 가서 따졌다. 직원이 자기 매장은 일반적인 아이스티 맛과 다르다고 답했다.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따지다가 시간이 없어서 그냥 다른 음료수를 다시 주문하고, 그 맛없는 아이스티는 내가 마시기로 마음 먹었다.


아이들에게 빨리 화장실을 다녀오라고 재촉하고, 삼척행 버스를 탈 승강장을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을 나온 아이들 손을 양손에 붙잡고 빠른 걸음으로 승강장을 찾아다녔다. 승강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뒤져도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이제 버스 출발 시간이 몇 분 남지도 않았다. 마침 직원이 보이길래 표를 보여주며 물었더니, 여기가 아니라 건너편이라고 했다. 다급한 마음에 건너편이라는 게 어디를 말하는 건지, 어떻게 가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직원에게그대로 물었는데, 매우 불친절한 태도로 계속 건너편이라는 답만 반복했다. 나 역시 어떻게 가는 거냐는 질문만 반복했다. 결국 옆에서 보다못한 다른 직원이 2층으로 올라간 후 건너가서 다시 내려가라고 답했다. 시간은 이제 3분 남짓 남아있었다. 미칠 것 같았다! 다시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꼭 쥐고 빠르게 길을 찾기 시작했다. 에스컬레이터를 올라탔는데, 몇 칸을 걸어오르니 하필 어르신 두 분이 길을 막고 서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 끝까지 열이 올랐다. 어르신들은 에스컬레이터가 끝까지 올라간 후에도 느릿느릿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빨리 비켜주면 좋을텐데, 여전히 길을 막고 있었다. 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 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어르신들이 완전히 비켜서기까지 몇 초가 몇 시간인 것 처럼 길게 느껴졌다.


길이 열리자마자 애들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통로를 빠른 속도로 뛰었다. 내려가는 계단에서는 애들이 뒤처지길래, 빨리 쫓아 오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혼자 뛰어내려갔다. 막판에 이번에는 할머니 한 분이 손수레에 짐을 잔뜩 실고,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분이 비켜주기를 기다리면 무조건 차를 놓칠 것 같았다. 빠르게 눈을 돌려 시계를 보니 이미 출발 시간이 살짝 지나있었다.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일단 뛰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할머니가 무거운 수레를 끄느라 낮은 자세로 힘을 쓰고 계신 동안, 뛰어 내려온 탄력으로 훌쩍 뛰어넘었다. 착지한 순간 등과 양쪽 어깨에 맨 무거운 짐들이 휘청거렸지만, 곧바로 균형을 잡고 뛰었다. 전력질주. 저쪽에서 삼척행 고속버스 문이 닫히려는 걸 발견했다. 마침 내가 뛰어오는 걸 본 직원이 닫히고 있는 버스 문을 두들겨 기사님께 차를 세우라고 했다. 딱 우리 세 명 자리가 비어서 잠시 기다리다 포기하고 출발하려던 모양이다. 


직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바코드를 찍는 동안, 아이들도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아까 만났던 직원은 정말 불친절했지만(여유가 있었다면 그 예의없는 태도를 꼬집어줬을 것이다.) 이 직원은 또 엄청 친절했다. 늦어서 죄송하다가고, 숨을 헐떡이며 표를 처리하는 동안, 괜찮다고 천천히 하시라고 말해줬다. 버스에 오르니 일제히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 때문에 거의 5분쯤 출발이 늦어졌을 것이다. 기사님과 승객들에게 큰 소리로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 버스를 놓쳤다면 일정이 엄청 꼬였을 것이다. 휴가 첫날 출발부터 땀을 엄청 흘렸다.


삼척에 도착해서도 자주 오지 않는 대중교통으로 움직이기가 정말 어려웠다. 무거운 짐을 들고 잘 알지도 못하는 버스 정류장을 찾아다녀야 했고, 버스 도착 시간을 알지 못해 1시간 이상을 땡볕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버스를 잘 못 타서 30분 이상을 걸어가야 하는 일도 있었다.


** 택시 잡기, 방 구하기 **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한 해변에서 아이들은 즐겁게 해수욕을 즐기고, 나는 아이들이 잘 보이는 의자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가끔 애들과 물에서 놀다가 나오기도 했다. 이때가 가장 즐겁고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기억을 떠올려보니 결혼 후엔 휴가 중 책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다. 늘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뭔가를 챙겨야 했고, 맘 편히 책을 읽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휴가는 쉼이 아니라 가사 노동과 육아의 연장이었다. 비록 한 나절이었지만, 그 해변의 독서가 정말 좋았다.


예약해 둔 레일바이크를 타러가려고 여유있게 짐을 챙겨 해변을 떠났다. 대중교통으로 이동이 불가능한 곳이라 택시를 탈 생각이었다. 적절한 곳에서 택시를 기다렸는데,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급하게 콜택시를 검색해서 전화했는데, 전화를 받은 직원은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한참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지나가는 택시도 없고, 콜택시 회사에서도 답이 없이 시간만 계속 흘렀다. 급한 마음에 다른 콜택시 회사를 검색해서 전화했는데, 아까 전화받았던 여직원이 다시 받았다. 번호는 달라도 다 같은 곳이란다. 계속 기다리란다. 


길에서 20분 이상을 보내고, 이제 택시를 타도 시간 맞춰 도착하기 어려울 시점이 되었을 때, 포기할 수 밖에 없겠다 생각이 들었다. 레일바이크를 못 타더라도 이 해변을 벗어나야 하니, 아이들을 데리고 교통 통제하는 분에게 다가갔다. 택시를 잡으려면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았다. 아저씨가 콜택시를 부르라고 하길래, 전화했는데, 20분 넘게 답이 없다고 말했다. 그 분은 진작 자기에게 말하지 그랬냐고, 택시를 연결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진짜 5분 후에 택시가 도착했다.


기사님께 상황을 설명했다. 검색 결과 그 해변에서 레일바이크 승강장까지 30분 정도 걸리는 걸로 나왔는데, 남은 시간은 17분 정도였다. 기사님은 잠시 고민하시더니, 어쩌면 시간 맞춰 도착할 수 도 있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했다. 본인이 집이 남쪽이라 이 길을 매일 오가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 빨리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정말 엄청난 속도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신호에 걸리면 이런저런 편법과 불법을 저질렀다. 가장 차량이 많은 구간을 지나면서 기사님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마음 놓으라고, 무조건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기사님은 3분 가량 남겨두고 우리를 내려줬다. 뛰어 들어가 개찰구 앞에서 시간을 보니 정확하게 출발시간이었다.


레일바이크 구간은 길었다. 내리막 길이 많아서 그리 힘들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라 바람이 선선했고, 바다를 끼고 달리는 풍경은 멋있었다. 다만 앞에 줄줄이 늘어선 바이크들이 속도를 내지 못해 좀 답답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8시 조금 넘어 도착할 줄 알았는데, 9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일정이 어떻게 될 지 몰라 숙소 예약을 하지 않았었다. 원래는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서 숙소를 정할 생각이었으나, 도착이 늦어져 이미 버스가 끊긴 시간이었다.


방을 구하기 위해 펜션을 돌아다녔는데, 계속 빈 방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몇 번을 돌아서고 나니 작은 아이가 걱정하기 시작했다. 말로는 분명 빈 방이 있을거라고 아이를 안심시켰지만, 나 역시 속으로는 이러다 방을 못 구하는 거 아닌가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펜션에서 엄청나게 넓은 방을 구했다. 30평짜리 방을 예약한 팀이 갑자기 취소해서 비어있다고 했다. 어차피 주인장은 위약금을 받았으니, 그냥 작은 방 가격에 주기로 했다. 들어가보니, 방이 2개, 화장실이 2개에 거실이 엄청나게 넓었다. 축구해도 되겠다 싶었다.


** 휴대폰 분실 **


삼척에서 지낸 3일은 계속 시간에 쫓겼다. 삼척 마지막 날 부산 가는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가는 길에 큰 아이가 갑자기 발에서 피가 난다고 했다. 모기 물린 곳을 긁어서 상처가 났는데, 맨발에 신발을 신고 다니다가 피가 터진 모양이었다. 갑자기 피를 줄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좀 당황해서 얼른 가방을 열어 휴지와 약과 대일밴드를 꺼냈다. 그 와중에 아이가 자기 휴대폰을 나에게 건넸다. 큰 아이는 평소에도 그렇고, 이번 여행에도 주머니가 없는 옷을 입은 채, 폰을 계속 손에 들고 다녔다. 가방에 넣으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이번에도 폰을 둘 곳이 없으니 나에게 맡겼는데, 나는 아이 발의 피를 닦고 약을 바르느라 건네받은 폰을 공중전화 부스에 올려두고, 신경도 쓰지 못했다. 대일밴드까지 붙이고 아이 손을 잡고 출발하면서 폰을 놔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부산행 버스 표를 끊고, 시간에 쫓겨 급하게 짜장면을 먹고 버스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탔는데, 아이가 폰을 달라고 했다. 아이의 폰을 어디 뒀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급하게 공중전화 부스를 향해 뛰었다. 아까 폰을 놔둔 후로 약 20분 가량 지났는데, 폰은 그 자리에 없었다. 평소라면 그렇게 어이없게 잃어버리지 않았을텐데, 여러 이유로 너무 정신이 없었다. 곧바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누가 가져갔는지 몰라도 안 받았다. 그 근처를 돌면서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만 울릴 뿐 받지 않았다. 대여섯번 가량 전화를 걸다가 결국 버스 시간에 맞춰 버스에 올랐다.


부산으로 가면서 큰 아이는 울었다. 나중에는 울다가 지쳐 잠들었다. 나는 계속 아이 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 폰을 주웠다면 부산집으로 택배로 보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대신 사례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폰을 습득한 이는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몇 십번을 걸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걸어도 소용없었다. 결국 절반쯤 갔을 때, 포기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끔 한번씩 전화를 걸긴 했지만, 이젠 기대를 접었다.


** 문 부수기 **


큰 아이는 부산에 온 첫날은 잃어버런 휴대폰 때문에 계속 기분이 안 좋았지만, 다음날 사촌동생들과 만난 후에는 다시 재밌게 놀았다. 그렇게 3일을 잘 놀고 서울로 돌아가는 날 큰 거 한 건을 터뜨린다.


전날부터 아이들에게 여러차례 미리 짐을 잘 챙겨놓고 나갈 준비를 다 해놓으라고 말했는데, 두 꼬마 녀석들은 준비도 하나도 안 하고 티비만 보고 있었다. 내가 분주하게 짐을 챙기고 준비하는 동안, 그렇게 티비만 보는 녀석들에게 아버지가 참고 참다가 한 마디 했다. 미리 다 챙겨놓고 티비 보라고. 하지만 티비에 푹 빠진 녀석들에게 그 말이 들릴 리가 없다. 결국 한참 후에 아버지가 화를 내셨고, 나도 한 마디 거들수 밖에 없었다. 


그럼 죄송하다고 한 마디하고 씻고 준비하면 될 것을 한창 사춘기에 돌입한 큰 아이가 화를 내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부산집은 아주 아주 오래된 아파트다. 문틀이 다 내려앉아서 문이 제대로 안 닫히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화장실 문이 잘 안 닫히고, 잘 안 열린다. 명절에 우리 식구와 동생네 식구까지 모이면 10명 이상이 그 화장실 하나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데, 잘 안 닫히고 잘 안 열리는 화장실은 치명적이다.


잠시 얘기가 화장실 문으로 샜는데, 암튼 작은 방 문 역시 아귀가 안 맞아서 안 닫힌다. 이 문은 잘 안 닫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 닫히는 상태였다. 그런데 큰 아이가 화가 난다고 문을 쾅 닫고 들어가버렸다. 엄청 큰 소리가 났고. 문이 닫혔다. 나는 짐을 싸다가 큰 소리에 화가 나서 달려가 당장 문을 열라고 소리를 쳤다. 그랬더니 큰 아이는 문 안 잠갔다고 소리를 높여 대들었다. 나는 문이 안 열리니 빨리 열라고 했고, 안에 같이 들어가있던 작은 아이가 손잡이를 돌려보더니 안 열린다고 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안에서도 밖에서도 안 열리는 상태, 즉 문 손잡이가 완전 망가져서 고장난 상태임을 깨달았다. 


점점 기차 타러 출발해야 할 시간은 다가오는데, 준비를 거의 안 한 아이 둘이 방 안에 갇혀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큰 아이의 반항 때문에 아버지와 나는 화가 날대로 난 상태였다. 즉, 차분하게 다른 생각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나는 번갈아가며 신경질적으로 문 손잡이를 돌려 보다가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아버지는 나에게 문을 부수라고 말했다. 나는 어깨로 문을 들이 받기 시작했다. 두꺼운 나무문은 여러차례 들이받고 나서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깨로 치고, 발로 차고, 손바닥으로 내려 치는 등 십여차례 온 힘을 다한 결과 문의 위쪽 부분이 조금 갈라져서 방 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잠금쇠가 잠긴 손잡이 부분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때 아버지가 장도리를 가져오셨다. 나는 망치 부분으로 손잡이를 내려치고, 뾰족한 부분으로는 손잡이 이음새에 걸고 당기며 손잡이를 해체하려고 힘을 썼다. 저 손잡이만 어떻게 뽑아내면 문이 열릴것 같았다. 몇 분 후 손잡이를 부셔서 뽑아냈다. 하지만 문은 여전히 단단히 잠겨 있었다. 


손잡이를 뽑은 자리에 동그랗게 구멍이 나서 안에 갇힌 아이들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그렇게 문 손잡이가 뽑히고, 구멍으로 밖이 보이는 모습이 우스웠나 보다.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안 그래도 화가 난 상태에서 간신히 화를 참고 계셨는데, 아이들이 웃으니 버럭 화를 내셨다.


결국 다시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두꺼운 나무 문을 절반 이상 쪼개어 뜯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문을 열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손을 조금 다쳤다.) 아이들에게 빨리 준비하라고 시키고, 절반 가량 뜯겨나가서 마치 폐가에 와있는 듯한 문짝을 우울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나와 아이들은 이제 기차타고 서울로 올라가지만, 남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 문을 계속 보고 있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실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문틀에 박혀있는 나사못이 눈에 들어왔다. 차라리 나사못을 따 뽑아서 문짝을 떼어내고 지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시간이 좀 있었으면 내가 떼어냈을텐데, 이젠 빨리 준비해 출발해야 했다.


큰 아이는 그 난리가 났는데도 그닥 뉘우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부산역에서 한바탕 야단치고, 혼자 반성하고 있으라고 내버려두고 작은 아이를 데리고 기차에서 먹을 간식거리를 사러 갔다. 기차를 타기 직전까지 한참 혼자 있던 아이는 막판에 내게 와서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아이에게 할아버지께 사과해야 한다고 설명했고, 아이는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사과를 해야했다.


서울로 돌아오고 하루쯤 지나서 어머니께서 연락하셔서 그때 문을 부수지 말고, 119에 신고했어야 했다고, 왜 아무도 그 생각을 못 했냐고 말씀하셨다. 사실 몰랐다. 살면서 단 한번도 119를 불러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불이 난 것도 아닌데 불러도 되는줄 몰랐다.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읽고 싶은 책 읽기


한동안 아니 꽤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책보다, 일과 관련한 책들 그러니까 읽어야 하는 책들 중심으로만 읽었다. 읽고 싶은 책을 읽을만큼의 여유는 없었으니까. 최근에는 읽어야 하는 책들을 안 읽고 일부러 읽고 싶은 책들, 소설들을 찾아 읽었다.


지난 몇 달간 정유정의 책들을 찾아 읽고, 요 네스뵈와 스티븐 킹 등도 읽었다. 문제는 신작이나 안 읽었던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러기 전에 내가 왜 이 작가를 선택했는지 깨닫기 위해 이미 읽고 좋았던 책들을 먼저 다시 읽어야 다른 작품에 손이 갔다. 그래서 정유정은 가장 먼저 읽었고, 가장 좋았던 [28]을 세 번이나 읽고 나서야 [7년의 밤]과 [종의 기원]을 읽을 수 있었고, 요 네스뵈 역시 가장 먼저 읽었던 [아들]을 다시 읽고 나서 [스노우 맨]과 [레드 브레스트]를 읽었다. [제노사이드]를 읽고 꼭 다른 작품들도 읽어야지 맘 먹었던 다카노 가즈아키도 마찬가지였다. 곧바로 [13계단]이나 [KN의 비극]을 시작하려니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제노사이드]를 다시 읽었다. 이제 둘 중 하나를 시작해야 할텐데, 역시 먼저 썼던 [13계단]부터 손을 댈지, 아니면 나중에 쓴 [KN의 비극]을 먼저 읽을지 고민이다.


그 중간에 아마 8월 중후반쯤 아이들과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가 레미제라블1권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슬슬 시도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쭉 살펴보니 3권을 제외하고 다 있었다. 왜 3권만 없을까 궁금했지만 일단 나머지 4개의 책을 사고,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도 샀다. 레미제라블은 3권까지 다 구해놓고 읽으려고 아직 시작은 못하고 있다. 지난 주 다시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더니 여전히 3권은 없었다. 이번에도 3권을 제외한 나머지 1,2,4,5권은 다 있었다. 왜 계속 3권만 없을까? 그것만 특별히 재밌어서 다들 안 파는 건가? 그것만 특별히 적게 찍어서 유통량이 적은가? 그것만 특별히 불량이 많아서 중고 판매가 잘 안 이뤄지나?


암튼 급할 건 없다. 일단 다카노 가즈아키의 책 2권을 먼저 읽을 생각이니까. 그동안 레미제라블 3권을 구해봐야지. 중고로 못 구하면 새 책으로 구하지 뭐.















최근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분에게 에너지 강의를 들어볼 일이 있었다. 늘 탈핵 진영 선수들의 강의만 듣다가 처음으로 정부쪽 선수의 강의를 들은 건데, 무척 신선한 경험이었다. 들으면서 계속 비교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라면 이렇게 접근했을텐데, 나라면 이렇게 설명했을텐데, 저 사람은 저렇게 얘기하는 구나. 신기하다! 이러면서 푹 빠져들어서 들었다.


하나 부러운 것은 이분 과학쪽 기초 지식을 잘 알고 계셔서 물리학과 화학 관련 내용이 나왔을 때 막힘없이, 비교적 쉽게 설명했다. 나는 전혀 모르는 분야이고, 매우 취약한 분야이다. 그래도 환경운동하면서 생물학 쪽은 조금 배웠는데, 물리와 화학 쪽은 정말 모른다. 그나마 에너지 영역에서 일하면서 조금 아는 분야가 지구과학이었다. 암튼 뒤늦게 과학 공부를 새로 하려니 힘들다. 조금씩 천천히 배워가다 보면 재미를 붙일 수 있으려나? 암튼 [지구를 소개합니다] 이 책은 일과 관련해서 특히 원고 작업과 강의 등을 할 때 기초 소양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책인 듯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대로 이행하지 않고 한 발 뒤로 후퇴한, 신고리5,6호기 공론화 문제로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안 그래도 바쁜데, 이것 때문에 진짜 두배, 세배는 더 바쁘게 됐다. 상황이 정말 어렵다!


짧게 간단하게 쓰려던 글이 엄청 길어졌다. 이 바쁜 와중에 몇 시간을 쏟아부은 건지. 아휴! 이제 다시 정신차리고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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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9-15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서재가 있었군요.
막연하게 관심 갖던 주제인데 님의 서재에 좋은 책과 정보가 많아서 친구신청하고 갑니다.

감은빛 2017-09-26 00:3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인연을 맺어 무척 반갑습니다!

cyrus 2017-09-1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스펙터클한 부산 여행이었군요. 출발하기 전에 꼼꼼하게 준비를 하고, 여행 일정을 짜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생기면 여행이 완전 꼬여 버립니다. 단체 여행이 늘 이런 식이죠.. ㅎㅎㅎ

감은빛 2017-09-26 00:41   좋아요 0 | URL
저는 정말 아무 계획도 없으 그냥 출발하는 여행을 좋아해요.
젊은 시절에는 자주 그랬죠.
요즘도 가끔 그냥 기분 내키는대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요.

미리 숙소 예약하고, 어디갈지 다 정해놓고
이런 건 여행인 것 같지 않아서 별로 안 좋아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