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마지막 날, 올해 두 번째로 정장을 꺼내 입었다. 단순 참가로 신청했던 적정기술 국제심포지움 사전행사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해달란 요청을 그 며칠 전에 받았다. 적정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 책도 좀 읽고 공부도 좀 했지만, 아직 토론자로 나설 깜냥은 안된다 싶어 거절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두 발제자의 발제문을 꼼꼼히 살피긴 했지만, 토론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채 토론회 장소로 향했다. 어쨌든 앞에 나서는 자리인데, 마땅히 입을 옷이 없어 고민하다가 그냥 정장을 꺼내 입었다. 집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면서 역시 난 정장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다. 스스로 멋진 모습을 보며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비록 준비는 부족했지만) 왠지 말도 잘할 것 같은 기분이다.
토론자가 무려 8명이었다. 발제자 2명을 포함해 모두 10명이 앞에 앉았다. 토론회 참가자가 많지 않았고, 토론자와 발제자가 모두 앞에 앉으니, 청중으로 남은 사람이 단상에 앉은 사람의 사람의 두 배도 채 되지 않았다. 일부러 제일 왼쪽(청중석에서 보면 제일 오른쪽) 자리에 앉았는데, 사회자가 첫 발언을 나부터 시켰다. 소속 단체와 본인 소개를 중심으로 자유롭게 말하라고 했다. 이런 건 언제라도 준비가 되어 있다. 언론 인터뷰를 비롯해서 발전소 견학이나, 소모임 발표 등을 많이 해봐서 차분하게 하던대로 말을 이었다. 첫 발언이라 오히려 더 좋았다. 나중에 말씀하신 분들 중에 나와 비슷한 활동 영역에 계신 분들은 내가 했던 내용을 피해서 다른 내용을 중심으로 말해야 했다.
각 토론자마다 두 번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할말이 전혀 없을거라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두 번 모두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시간 조절에 신경을 써야 했다. 마침 당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RPS 개선안에 대해서도 내 의견을 덧붙일 수 있어서 좋았다. 지하철을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하며 언론 기사를 꼼꼼히 살펴봤기 때문이다. 토론이 끝나고 만족스러웠다. 스스로 돌아봐도 서두르거나 버벅대지 않고, 하고 싶었던 말을 또박또박 잘 전달했던 것 같다. 적절한 톤의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청중석에서 평소 관련 분야 활동으로 종종 마주치는 분들이 아는 척을 해주거나 응원해줘서 또 좋았다. 한 선배는 내가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는 사진을 찍어서 메신저로 보내줬다. 바쁜 시기에 토론회에 참석하느라 많은 시간(준비와 이동시간 포함)을 할애했지만, 그래도 의미있는 행사에 참여해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니 보람을 느꼈다.
그날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영화 [판도라]에 대한 내용이었다. 토론자 중에 시사회에서 [판도라]를 보고 오신 분들이 두 분 계셨는데,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우리나라는 탈핵에 성공할 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판도라] 보기 운동을 함께 펼치자고 제안했다. 잘 만든 영화라고,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현실을 깨닫고 나면, 탈핵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함께 마을버스를 타고 서울대학교를 나서면서, 버스 안에서 '영화 [판도라] 천만 관객 추진위원회(이하 천추위)]를 곧바로 결성했다. 그 자리에서 천추위 위원장도 바로 추대되었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는 계속 어느 날짜에, 어느 영화관을 빌려서 함께 보자는 얘기도 나왔고, 각 동네마다 상영관 앞에서 탈핵 서명을 받을 사람들을 조직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이 분들이 어떻게 각 분야에서 나름의 위치에 올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한 마디로 행동력 짱인 분들이었다.
<판도라를 보러 가실 분들은 동지날(12월 22일) 저녁 서울극장으로 가자! 무려 5천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
사회적경제 수업으로 중학교에서 '에너지 전환' 강의를 하고 있다. 나는 수업이나 강의를 하는 일이 즐겁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때 삶의 의미를 느낀다. 특히 요즘처럼 일이 잘 안 풀리고, 삶의 회의를 느끼는 시기에 아이들과 소통하고, 내 강의를 집중해서 듣고 에너지 감수성을 키워가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쓸모있는 인간이구나. 이렇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다.
지난 번 수업에서 핵 에너지의 위험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는 핵발전소를 짓고, 핵폐기물을 계속 만드는 행위가 인류와 지구에 대한 매우 심각한 범죄라고 설명했다. 핵 사고가 한번 나면 주변 30km 이내는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매우 오랜 시간 사람이 살 수 없다. 그 뿐인가? 대기와 바다로 방사능은 끝없이 유출되고, 농작물과 수산물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민 전체가 내부 피폭을 당한다. 내부 피폭은 외부 피폭에 비해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할까?
게다가 10만년 이상 자연으로부터 격리시켜야 하는 핵폐기물을 만드는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범죄행위다.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10만년을 상상할 수 있나? 10만년이면 국가도, 사회도, 언어도 다 변할만한 시간이다. 아마 1만년도 채 되기 전에 언어가 바뀌어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은 조선시대에 주로 쓰던 말과 다르다.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도 핵폐기물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한 마디로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얘기다. 만약 그런 기술을 갖고 핵폐기물을 밀폐 보관했다고 가정한다 해도, 그 곳에 '핵폐기장'이라고 '절대 위험'이라고 적어놓아도, 후손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아무리 튼튼하게 안전하게 핵폐기물을 밀폐했다 해도, 지진을 비롯한 다양한 자연재앙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수업의 마지막에 영화 [판도라[에 대해 설명했다. 지루해하던 아이들도 영화 얘기를 하니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로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이 영화를 한번 보는 것이 훨씬 더 핵발전소의 진실을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화가 12세 관람가이니 중학생들은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심을 갖고 꼭 보러 가라고 권했다.
정말 이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해서, 많은 사람들이 핵 에너지의 진실을 마주하고, 탈핵에 힘을 모아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요즘 녹색당에서는 '탄핵 다음 탈핵'이란 구호로 광장에서도 탈핵을 외치고,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녹색당에서도 공식적으로 영화 [판도라]를 홍보하고 있다.
http://www.kgreens.org/commentary/%EB%85%BC%ED%8F%89-%EC%98%81%ED%99%94-%ED%8C%90%EB%8F%84%EB%9D%BC%EB%A5%BC-%EB%B4%85%EC%8B%9C%EB%8B%A4-%EB%8B%B5%EC%9D%80-%ED%83%88%ED%95%B5%EC%9E%85%EB%8B%88%EB%8B%A4/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002&aid=0002021894
과연 대통령이 바뀐다고 탈핵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부산과 울산이라는 대도시 주변에 핵발전소 단지가 위치한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매우 위험한 나라다. 만약 핵폭발이 일어난다면 그 수많은 인구의 절대 다수가 피하지도 못하고 재앙을 맞을 것이다. 더 늦기전에 핵발전을 중단하고,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다. 후쿠시마 참사 이후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서서히 핵발전을 포기하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고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재생에너지는 다른 에너지원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성장을 이루고 있다. 해마다 신규 발전설비의 양으로 따지면 이미 핵발전과 화석연료를 이용한 발전시설보다 더 큰 규모를 보이고 있다. 유독 국가 에너지 정책에 핵 마피아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우리나라만 비정상적으로 재생에너지가 바닥에 머무르고 있다.
탄핵 다음은 탈핵이다! 이제 미래 세대와 지구에 대한 범죄 행위를 그만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에 동참하는 것이 지금 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