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장
페이스북에서 2012년 2월에 열린 서울녹색당 창당대회 단체 사진을 봤다. 그 사진에서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맨 앞자리 있었다. 보는 순간 놀랐다. 겨우 4년 10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참 많은 것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우리 아이들이 참 많이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두 번째, 그리고 나 정말 많이 늙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거울로 보는 나는 그렇게 늙어 보이지 않는데, 저 사진과 비교해서 나는 진짜 많이 늙었다. 그 사진 밑에 그 말을 그대로 댓글을 달았다. 그러자 아는 선배가 몇 년 사이에 폭삭 늙었다고, 자기도 주사 좀 맞으라는 댓글을 달았다. 아, 그런 주사 맞을 돈이 있었다면 이렇게 살고 있겠어?
또 다른 선배가 그 날 내가 시당위원장 선거에서 떨어졌다고 기억을 일깨워줬다. 그래. 창당전부터 운영위원을 맡아왔고, 몇몇 회의나 행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당일 추천을 받아 억지로 선거에 나섰었지. 당시 아내는 반쯤 농담이긴 했지만, 위원장이 되면 이혼이라고 엄포를 놓았고, 나는 앞에 나서자마자 이런 중요한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양했지. 추천하신 선배님의 의견을 존중해 차마 사퇴는 하지 못하지만, 표는 다른 분께 주십사 부탁을 드리고 내려왔지. 결국 3달 전 발기인대회에서 운영위원장이 되었던, 그릇이 모자란 인물이 나보다 2표를 더 받아 다시 선출이 되었지만, 채 2달이 지나지 않아 스스로 역량이 모자람을 인정하고 자진 사퇴하고 말았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가끔 내가 위원장이 되었어야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아마 지금보다 더 늙은 외모가 되지 않았을까? 이혼도 더 빨라지지 않았을까? 아이들과 보낼 수 있었던 많은 날들도 더 줄어들었을거다. 아마도. 그리고 나라고 그 위원장 직을 잘 수행했으리란 보장이 없다. 어쩌면 내가 욕했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못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채 5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늙었을까? 슬프다! 술이나 퍼야겠다.
목도리
금요일 아침, 애들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내 목도리를 찾아서 현관 앞에 놔뒀으니, 애들 데려갈 때 찾아가라는 거였다. 저녁에 애들을 만나서 목도리를 보니 낯선 물건이었다. 이게 내 목도리가 맞나? 폭이 넓고 긴 검은 목도리는 손으로 뜬 것이었다. 이 목도리는 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내가 하고 다닌 기억은 커녕, 누군가에게 받은 기억 조차 없었다. 애들 엄마는 왜 이 목도리가 내 것이라고 가져가라고 했을까? 어쩌면 자기 목도리가 아니니 당연히 내 것이라 여기고 가져가라고 한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애들 엄마가 직접 손으로 떠서 선물했던 것일까? 그럼 나는 왜 기억하지 못할까?
난 유독 귀찮은 걸 싫어해서 목도리 같은 걸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오래전 사귀었던 여자아이가 아주 긴 목도리를 직접 짜서 선물한 적이 있었다. 아마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것 같다. 그 회색 목도리가 아마 내 인생에서 거의 유일하게 매고 다녔던 목도리였다. 그건 그 여자아이와 헤이지고도 한동안 더 하고 다녔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서울에서 열린 친구 결혼식에 왔다가 단체로 어느 선배 집에 자러 갔다가 놓고 나왔다. 나중에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목도리를 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그 선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목도리를 핑계로 다시 만나기도 싫었고, 어차피 나는 이미 부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 대신 그 따뜻한 목도리를 잘 매고 다니길 바라며 곧 잊어버렸다.
그런데 이후로 내가 목도리를 매고 다녔던 기억은 없다. 저 검은색 털 목도리를 짜서 내게 선물한 사람은 대체 누굴까? 왜 나는 기억하지 못할까? 궁금하지만,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리고 저걸 매고 다닐 생각도 없다.
첫 눈 그리고 집회
토요일 아이들과 함께 집회에 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이들 둘과 함께 참여했던 마지막 집회는 언제였던가? 확실한 건 올해는 없었다. 아마 작년 3월 탈핵 집회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럼 거의 2년이 다 되었다. 큰 아이는 무조건 안 간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그냥이라고 했다. 작은 아이는 무조건 언니 편이다. 언니가 가면 가고, 안 가면 안 간다. 나는 집회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긴 시간 아이들만 집에 둘 수도 없었다. 저녁도 챙겨 먹여야 하고, 뭔가 불안했다.
페이스북을 보다가 눈이 온다는 소식을 알고 현관문을 열어봤다.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눈을 보고 환호했지만, 잠시 그러고는 다시 이불 속에서 인형놀이에 몰두했다. 나는 백미현의 [눈이 내리면]이란 곡을 떠올리며 잠시 슬픈 감정에 빠졌다.
한참 후에 생각해 낸 것이 서점에 가자고 애들을 꼬시는 거였다. 광화문에 나간 김에 교보문고나 알라딘 중고서점이나 잠시 들러야지 생각한 거다. 서점에 가면 늘 두 녀석에게 만화책 한 권씩 사주는 것이 거의 습관처럼 되었다. 아빠가 만화책을 사줄거라는 생각 때문에 큰 아이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작은 아이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나가서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작은 아이의 마음도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집안에서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몇 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결국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는 광화문으로 가지 못했다. 도중에 내려서 한참 걸어야 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아이들을 놓치면 큰일이라 두 녀석에게 꼭 아빠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오른손으로 작은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왼손엔 우산 3개를 들었다. 큰 아이는 내 왼팔에 팔짱을 꼈다. 인파에 휩쓸렸다. 녹색당 깃발을 찾으려다 포기하고 전화를 걸었다. 녹색당 깃발은 청운동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한참을 걸어 청운동 앞까지 갔지만 깃발은 찾지 못했다. 거기서 한동안 머물렀다. 주최측은 메인 행사를 위해 광화문으로 돌아가자고 했고 수많은 사람들은 발길을 돌렸다. 큰 고래 풍선이 있었고 풍선 위에 작은 노란 배가 있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풍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후에 세월호 유가족의 차량과 행렬을 마주쳤다. 나는 아이들에게 저 분들이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을 잃은 부모님들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하다가 나는 목이 잠겼다. 갑자기 울컥 울음이 터져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큰 아이가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잠시 멈춰 섰다. 한참 후에야 감정을 추스리고 하려던 말을 마쳤다.
광화문 근처에선 아예 움직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인파에 떠밀려가다가 전광판을 통해 행사를 지켜봤다. 레미제라블의 노래를 뮤지컬 배우들이 불렀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저 노래를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치환이 나올 때쯤, 큰 아이는 배가 고프다고 했고, 작은 아이는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다. 다시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경복궁 옆 시장통으로 가서 어딘가 들어가서 배를 채우고,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찰 버스가 인도와 차도를 분리시켜 차벽을 쌓아놓았다. 저 차벽만 아니면 인도를 통해 더 빨리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텐데. 속으로 욕이 나왔다. 자꾸 사람들에게 떠밀렸다. 키가 작은 작은 아이가 자꾸 사람들에 떠밀려 넘어질 뻔 했다. 한 번은 아이를 보호하려다가 내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더딘 걸음으로 빠져나가던 중에 후배 활동가를 만났다.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얼굴을 보는 건 거의 10년 만인가. 그 친구는 아기때 보았던 큰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이의 키는 그 친구와 비슷했다. 곧 그 친구와 헤어지고 우린 널널한 차도로 빠져나왔다. 시장통에 있는 많은 가게는 이미 들어가려고 줄을 선 사람들과 어딘가 마땅한 곳을 찾아 헤매는 인파로 좁은 골목이 꽉 차있었다. 작은 아이는 계속 화장실이 급하다고 했고, 나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말하며 마땅한 식당이나 술집을 찾았다. 마침내 한적한 술집을 찾아 들어가서 곧바로 작은 아이를 화장실에 보냈다. 모듬 소세지와 맥주 한 잔을 시키고 앉았다. 큰 아이는 많이 걸어서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소세지가 나와서 두 녀석은 그걸로 배를 채우고, 나는 맥주로 배를 채웠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거리로 나왔다. 녹색당 깃발을 찾다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녹색당 사람들은 경복궁 역을 지나고 있다고 했다. 우린 청운동쪽으로 들어가다가 돌아나왔다. 한참 후에 깃발을 찾았는데, 플라스틱으로 된 중앙분리대 때문에 바로 합류하지 못했다. 작은 아이와 큰 아이를 차례로 안아서 넘겨주고, 나도 넘어가서 비로소 녹색당 깃발 아래 섰다. 아이들은 이제 나보다 더 열심히 구호를 따라 외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하야송이 나올 때는 춤을 추기도 했다. 훗날 아이들은 이 날을 어떻게 기억할까? 무대에서는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힘들어했고, 시간이 늦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뭔가 먹을 것을 만들어주고, 나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함께 뻗었다.
맥주 네 캔, 꼬치 5개
일요일에는 다같이 늦잠을 잤다. 새벽에 작은 아이가 자꾸 이불을 차서, 자주 깨서 이불을 덮어줘야 했다. 늦은 아침을 차려줘야 했는데, 뭔가를 하기가 너무 귀찮았다. 애들을 데리고 동네 분식집에 가서 배를 채웠다. 그리고 어제 약속했으나 지키지 못한 만화책과 아이스크림을 위해 버스를 타고 나갔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아이들 만화책을 하나씩 사주고, 나는 네 권의 책을 샀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집에서 설겆이를 비롯한 집안 일을 하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었다. 애들은 만화책을 금방 다 읽고 놀았다. 아이들이 또 배가 고프다고 했다. 나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동네 슈퍼로 가서 뭔가 만들어줄 재료를 사왔다. 된장찌개에 두부와 호박과 팽이버섯과 열무김치를 씻어서 넣었다. 생선을 굽고 엊그제 반찬가게에서 사온 시금치 나물과 애들 엄마가 챙겨준 김치를 내어서 밥을 먹였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면 늘 허탈한 기분이 든다. 혼자 집에 있는 것이 너무 우울할 것 같아서 사무실에 나가서 일을 할 생각이었다. 저녁 8시쯤 아이들이 떠날 때, 읽던 책을 거의 다 읽어가고 있었다. 이것만 더 읽고 나가야지 싶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술이 땡겼다. 그리고 맛있는 뭔가를 먹고 싶었다. 고민했다. 오늘 밤 한 두가지 일을 처리해 놓아야 내일 해야 할일을 다 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런 때는 먹어줘야지.
옷을 입고 나가서 자주 가는 닭꼬치 집에가서 꼬치 5개를 포장해왔다. 사모님이 날 보고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고, 바쁘셨냐고 묻길래. 저번에 밤에 사장님만 계실 때, 문닫을 시간때쯤 한 번 왔었다고 답했다. 곧이어 사장님이 나왔고, 주문한 꼬치를 준비했다. 사장님은 어제 가게문을 닫고 촛불집회에 갔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보니 새벽 2시, 문닫을 시간에 혼자 찾아온 내게 괜찮다고 조금 늦게 들어가면 된다며 꼬치와 맥주를 내주고 둘이 한참 시국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긴 싸움이 될 가라고. 언론이 언제 등을 돌릴 지 모른다고. 반기문이 들어와 비박쪽에 붙으면 언론이 반기문에 촛점을 맞출 것이고, 그러면 어려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흑맥주 네 캔을 샀다. 맥주 네 캔과 꼬치 다섯개로 배를 채우며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오늘 산 다른 책들도 주욱 훑으며 읽었다. 도중에 금요일 이후 처음으로 담배도 피우고 돌아와 이 글을 두드린다. 내일은 또 바쁜 날이 될텐데. 잠이 오지 않는다. 술이 모자라지만, 지금 더 마실 수는 없을테고, 이불을 덮어쓰고 잠을 청해야겠다.
아래는 오늘 산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