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토요일 아침.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잠시 일본어를 들여다보다가, 조금 더 자고 싶어서 눈을 감고 아이들 곁에 누워서 이마에 입을 맞추고 꼭 껴안았다. 녀석들은 귀찮다고 몸을 돌려버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안와서 포기하고 일어났다. 어제 세탁기를 돌렸다가 아이들 씻느라 마지막 헹굼을 못 했던 걸 떠올리고, 우선 빨래를 다시 돌렸다. 쌀을 씻어서 불리고, 뭘 만들지 고민하면서 냉장고를 열어봤다. 어제 저녁에 된장찌게를 끓이려고 두부와 애호박을 사놓았다. 그리고 야채 몇 가지가 있으니, 샐러드를 만들어야 겠다. 며칠 전에 사놓은 곤약을 썰어서 끓는 물에 데치고, 쌈채소와 깻잎을 씻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파프리카를 씻어서 썰었다. 큰 그릇이 없어서 재료를 많이 썰지 않고 적당히 양 조절을 해야 한다. 곤약을 찬 물에 헹궈서 다시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소스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했다. 간장, 다진마늘, 참기름, 식초, 매실액, 후추를 섞었다. 준비한 재료 위에 뿌려서 섞은 후 먹어보니 맛이 괜찮았다. 뭔가 조금 아쉬운 느낌도 들긴 했지만, 없는 재료로 만든 것 치고는 이만하면 괜찮은 거지 뭐. 된장이 끓을 무렵 충분히 불은 쌀을 압력밥솥에 넣고 물을 맞춘다. 밥 맛은 무조건 물조절이다. 기준선 근처에서 조금 따랐다가 다시 조금 부으면서 맞추고 불에 올렸다.


밥이 다 되고, 된장찌개가 다 끓고, 샐러드가 완성되었다. 녀석들은 오늘따라 늦잠을 잔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으니, 빨래를 널었다. 라디오 '오늘 아침 정지영입니다'를 듣고 있는데, 알라니스 모리셋의 'Thank you'가 나왔다. 20년 전에 무척 좋아했던 가수였다. 잠시 옛 추억에 젖었다가 방으로 돌아오니, 두 녀석이 깨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들어가서 한 팔에 하나씩 껴안았다. 


왜 하필 나를


며칠 전 어느 단체를 책임지는 사람에게 자기 후계자로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단체 회원일 뿐, 아무런 업무 연관성도 없는데, 왜 하필 나를. 또 며칠 전 어느 회의에 꼭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솔직히 내가 굳이 가지 않아도 될 회의라서 안 갈 생각이었는데, 부탁을 받고 보니 안 갈수가 없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 나에게 와달라고 요청했던 선배 말고 다른 선배가 나를 꼭 원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 회의 논의 내용과 크게 관계가 없는데, 왜 하필 나를.


예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적이 많았다. 왜 사람들은 나처럼 못난 인간을 좋게만 봐줄까? 그건 본질을 잘 모르고,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거나 사람들이 나를 좋게 보는 면이 어떤 것들인지 한번 생각해봈다. 우선 외모에 대한 건 대부분 착하게 생겼다는 얘기다. 인상이 좋다. 순한 인상이다. 뭐 이런 얘기들. 다음으로 태도. 사람들의 이야기나 의견을 주의깊게 열심히 듣는 편이라 그런 점에서 좋은 평가를 자주 받는다. 잘 듣는 사람. 그래서 후배들이 고민 상담을 청하는 경우도 많았다. 말할 때는 차분하게 진지하게 신중하게 말한다. 내 말 한 마디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계속 생각하면서 말하는 편이다. 학원 강사를 했던 시절부터 어떻게 하면 내 말을 상대방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어떤 생각을 떠올리면 그 생각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 그런 점에서 쉬운 설명과 자신감 있는 태도 등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 


내가 잘 하고 또 좋아하는 건, 강의나 발표인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잘 알고 있는 뭔가를 알기 쉽게 알려주는 일이 좋다. 아이들 대상으로 한 강의도 좋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도 좋았다.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나 자신은 좀 많이 멋있어 보이고, 재밌게 설명을 잘 한다는 말을 들으면 뿌듯하다. 또 글쓰는 일도 좋다. 글을 잘 쓰기 위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하지만, 업무와 관련된 글이거나 청탁받은 글이라서 부담감이 생겨서 그렇지. 평소 내가 원해서 쓰는 건 재밌다.


활동가가 되고 나서 제일 많이 한 일은 아마 회의가 아닐까? 수많은 회의들이 늘 나를 기다리고 있다. 회의를 잘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선 그 회의의 성격과 안건에 대해 충분히 알고 들어와야 하고, 자신이 아는 것만 떠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잘 듣고, 자신의 의견을 핵심적인 내용만 짧고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의 주최자가 되면 또 입장이 달라진다. 그때는 빅마우스(말이 많은 사람)를 견제하고, 입을 잘 열지 않는 사람들이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체 분위기를 읽고 흐름이 끊기지 않으면서 원활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잘 조율해야 한다.


최근 누군가 나를 '회의쟁이'라고 불렀는데, 예전에 누군가는 '회의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라고 그 많은 회의를 원해서 다니겠나? 회의를 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피곤한 일이다. 그리고 회의 결과에 따라 늘 해야할 일이 따라온다. 몇 해 전, 녹색당 초창기에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다보면 늘 이야기가 산으로, 바다로, 엉뚱하게 흘러가곤 했는데, 그런 흐름을 바로 잡고 제대로 논의를 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러다보면 저절로 나에게 많은 역할이 주어지고, 많은 일을 떠안게 될 수 밖에 없다. 지금도 몇몇 연대단위 회의를 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일을 자꾸 떠안게 되어서 이젠 웬만하면 회의에서 안 떠들고, 가만히 있으려고 노력하는데, 뭔가 분위기가 잘못 흘러간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내가 잘 못하는 일들, 나의 단점도 무척 많다. 우선 나는 다소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다. 이게 어떨 때에는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단점으로 작용한다.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은 욕심이 크다보니, 어떤 일을 두고 판단할 때, 이게 완벽하게 될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잘 손을 대지 않게 된다. 그게 꼭 필요한 일이고, 급한 일인데, 내 판단에 아무리 봐도 완벽하게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으면 하기가 싫고, 자꾸 피하게 된다. 또 해야할 일들의 목록 중에서 우선 순위가 높아도, 아직 이 일이 완벽하게 풀려갈 상황이 조성되지 않았다면, 완벽한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경향도 있다. 그렇게 일을 미루는 것은 매우 나쁜 버릇인데, 이 완벽을 추구하는 기질 때문에 쉽게 고치지 못하고 있다.


또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쉽게 지치고 상처받는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태도와 예민한 성격 탓에 별거도 아닌 상대방의 말이나 태도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이건 다음에 또 일 때문에 그를 만날 때,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그 불편함이 결국은 그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느긋하고 여유있는 삶을 좋아한다. 어쩌다 이렇게 정신없고 바쁜 삶을 살고 있지만, 본성은 그런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이불 속에 누워 하루를 보내는 주말이 제일 좋다. 평소엔 잠을 못자고 밤 늦도록 일을 하거나,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지만, 늘 바쁘게 뛰어다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을 해야 하지만, 일주일에 하루쯤은 푹 자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어디에도 가지 않고 가만히 시간을 보내야만 이 삶을 버틸 수 있다. 


이렇게 단점이 많은데, 업무 연관성도 없는 곳에서 나를 원하는 건, 그저 보이는 모습이 괜찮아 보이고,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기 때문이겠지. 그냥 단순히 사람 좋아 보이고, 일도 괜찮게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렇겠지. 어쨌거나 돈 많이 줄 수 있는 곳에서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 20대 후반에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늘 나를 원하는 조직은 돈이 없는 조직이었다.


이런 삶, 슬프다
















강수돌 선생의 [여유롭게 살 권리]를 읽고 있다. 늘 원하는 건, 그런 삶이다. 여유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고, 그 책에 대해 충분히 느끼고 고민할 시간도 가질 수 있는 삶. 그 고민과 느낌을 글로 풀어낼 여유가 있는 삶. 또 그 고민과 느낌을 주위 사람들과 만나 함께 나눌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삶.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삶. 누군가를 만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고, 일상의 고단함과 현실의 비루함을 한탄할 수 밖에 없는 삶이다. 


이 책에는 일중독을 일종의 질병으로 생각하고 본인이 일중독에 거렸는지 아닌지 스스로 진단하는 테스트가 있다. 읽어보니 나는 분명히 일중독이더라. 이 병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가 바뀌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사회가 바뀌어야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회를 바꾸는 건 개인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일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펴고, 조금씩 인식을 바꿔나가다보면 조금씩 사회도 바뀌지 않을까 싶다.


며칠 전 일 때문에 어느 협동조합 활동가에게 연락을 했다. 퇴근시간을 살짝 넘긴 6시 5분쯤이었다. 그는 '의무 정시퇴근날'이라 사무실을 나왔기 때문에 지금은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의무 정시퇴근날'이라. 나도 그렇고 대다수 협동조합은 열악한 상황에서 많은 일들을 해야 하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야근을 자주 할 수 밖에 없다. 얼마나 야근이 일상이면, 정시 퇴근을 의무 사항으로 정한 날이 따로 있겠나. 


요즘 너무 바쁜 시기인데, 너무 일이 하기 싫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어디 아무도 모를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든다. 그래야 할까? 그럴수 있을까? 모르겠다. 


오늘 백남기 어르신의 노제가 열렸고, 저녁엔 집회가 있을 예정이다. 낮동안은 아이들과 지내야 하니, 나가지 못하지만, 저녁에 어떻게 할지 고민이다. 마음은 당연히 집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나는 급한 교정 일거리를 맡아 일정에 쫓기고 있다. 오늘밤 교정을 보지 못하면 인쇄 일정을 맞추지 못한다. 일을 해야겠지. 아무리 집회에 나가고 싶어도 꾹 참고 일을 해야겠지. 비록 토요일 밤이지만 꼼짝말고 일을 해야겠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삶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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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05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많이 알수록 그 상대방의 감정을 최대한 맞추려고 합니다. 이렇다 보니 저도 쉽게 지치는 편입니다. 진짜 감정을 표출하고 싶은데, 괜히 제가 불리해질까 봐 꾹 참고 넘어가는 일이 많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힘든데, 제 자신의 소극적인 행동에 한 번 더 괴로워집니다. ^^;;

감은빛 2016-11-08 18:43   좋아요 0 | URL
저는 사람에 따라 꽤 달라지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에게는 감정을 잘 드러내는 편인데,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안되더라구요.

그런데 사회생활을 오래하다보니 이젠 좀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이런 건 좀 불편하다는 느낌을 주거나,
이런 태도는 좀 아닌 것 같다는 뉘앙스를 전달할 수 있게 되더라구요.
일로 만나는 사람들에겐 좀 쿨하게 대할수 있게 된 것 같아요.

samadhi(眞我) 2016-11-06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엘라니스 모리셋 노래 좋아해요. 엊그제 같은데 그새 세월이 그렇게 흘렀나요. 목소리가 정말 예쁜데. 너무 빨라서 차마 따라 부르지는 못 하고.

감은빛 2016-11-08 18:46   좋아요 0 | URL
세월이 참 빠르죠!
[You Oughta Know]를 매일 들었던 게 96년이었던 것 같아요.
완전 빠져있던 가수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