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와 번데기


아침 알람이 울렸다.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인셉션]에서처럼 멀리서부터 조용히 울리던 음악이 점점 커졌다. 아마 뭔가에 쫓기고 있었던 것 같은데, 달리다 말고 멈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문득 이건 꿈이고, 알람이 울리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힘겹게 눈을 떠 전화기를 찾기 위해 손을 뻗어 더듬었다. 알람을 끄고, 왼쪽에서 자고 있는 큰 아이를 깨웠다. 녀석은 아직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이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작은 아이는 내 오른팔을 베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내 몸에 바짝 붙어 있었다. 새벽에 잠시 깨서 저 멀리 이불 밖으로 나가있는 아이를 안아서 내 몸에 바짝 끌어놓고, 팔베게를 해줬는데, 그 자세 그대로 자고 있었다. 작은 아이를 깨웠는데, 요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작은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이어서 큰 아이의 이마에도 입술을 대었다가 몸으르 일으켰다.


곧 큰 아이가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들이 지난 번에 가져왔다가 먹지 않은 수제 쵸코 쿠키와 삶은 계란과 치즈를 준비했다. 쿠키를 세 조각으로 나누고, 삶은 계란 세 개의 껍질을 까서 한 접시에 담아 두었다. 치즈 세 개는 비닐에 포장된 상태 그대로 포개두었다.


최근 작은 아이가 우리 집에 오면 유난히 늦게 일어나는 편이다. 늦게 일어나면 또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고 울기도 했다. 지난 번에는 그렇게 울고 난리를 치는데, 억지로 보내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어쩔수없이 데리고 출근했었다. 오늘은 어떻게 깨워야 할까 고민하다가, 노트북을 켜고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유튜브에서 볼 빨간 사춘기의 <나만 안되는 연애>를 틀어서 잠시 듣다가 작은 아이의 가방을 챙겼다. 음악은 자동으로 다른 곡으로 바뀌었는데, 뒤이어 아이유와 울랄라 세션이 부른 <애타는 마음>이 나왔다. 큰 아이가 계란을 먹다가 아이유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워 했다.


"아빠, 나 일곱살 때 아이유 언니의 노래 좋아서 맨날 따라 불렀다." 큰 아이가 입에 든 계란을 다 씹고 물을 마시며 말했다. 기억이 난다. 당시 이 녀석이 아이유의 <좋은 날> 의 곡에 가사를 바꿔 불렀던 걸로 서재에 글을 쓰기도 했었다.


 한 이삼일쯤 전이었다. 아침에 작은애가 응가를 하는 통에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어쩌구 하느라고 아내와 내가 정신이 없을 때였다. 혼자 부엌(겸 거실)에 앉아서 놀고 있던 큰 애가 그 노래의 가사를 바꿔서 부르기 시작했다.  


'왜 내 옆엔 아무도오 없는건지 ~ ♪ 빰빰빠바밤빰~빰~ ♪ 엄마 아빠는 모두 동생곁에 있는건지 ~ ♪~ 빰빰빠바밤~빰~♩~' 


동생이 태어난 지 이제 곧 1년. 약 5년간 독점하고 있던 엄마, 아빠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동생에게 빼앗긴 채 지나간 세월이었다. 그동안 숱한 설움과 고통과 화를 참아왔을 것이다. 가끔 백창우 동요집에 나오는 '애기때문에 못살겠어~ ♪ 애기때문에 못살겠어~ ♪ 할퀴고~ 차고~ 할퀴고~ 차고~ ♪' 이 노래를 종종 부르기도 했는데, 이번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노래가사를 바꿔가며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꼬마 여우 두 마리 (http://blog.aladin.co.kr/idolovepink/4729682) 2011-04-19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일곱살 때 네가 그랬어. 기억나? 이렇게 묻고 싶었는데, 녀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친구와 교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다 온 모양이다. 아이는 입에 물고 있던 치즈를 빠르게 먹고, 후다닥 일어났다. 아이가 나가기 전에 유튜브를 검색해 <좋은 날>을 켰다. 그리고 작은 아이를 깨웠다. 작은 아이는 그냥 깨웠으면 안 일어났겠지만, 노래 소리를 듣고는 몸을 일으켜 제일 먼저 노트북 화면을 쳐다본다. 큰 아이가 나가고, 작은 아이를 화장실에 들여 보냈다.


내 준비를 모두 마치고 작은 아이를 쳐다보니, 이불로 온 몸을 감싸고 얼굴만 내놓고 누워있다. 아이를 불러 가자고 하니, "저는 지금 번데기예요. 번데기는 움직일 수 없어요." 라고 말한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잠시 장단을 맞춰 놀아주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다시 한번 나와서 잠바를 입고 신발을 신으라고 했다. "저는 번데기예요. 아빠가 와서 꺼내주기 전에는 못 움직여요." 라고 했다. 아이의 가방과 내 가방을 현관 앞에 놓아두고 방으로 가서 작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안아 일으켰다. 녀석은 내 품에 꼭 안겼다. 사랑하는 이를 꼭 껴안는 일은 참 행복한 일이다. 포근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어 참 좋다. 어쩌면 이렇게 며칠에 한 번씩 아이들을 꼭 안아보기 위해 이 지겹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당신을 조종하는 '간디스토마 유충'은 누구?














업무 관련 책들, 글쓰기 위한 자료로 발췌 독서를 한 책들 외에는 책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 후 우리 집에 놀러왔던 친구는 내 책장을 보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앞으로 공부하러 도서관에 갈 필요 없이 우리집에 오겠다며, 자기가 원하는 책들 대부분이 다 있다고 했다. 속으로 못 읽은 책이 많아서 조금 부끄러웠다. 하나씩 천천히 읽어가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주에 뽑아든 책은 [너희들의 유토피아]였다. 출간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으니, 아마 2010년 겨울에 샀고, 사자마자 좀 읽다가 방치했었다. 다시 읽으려니 앞부분 내용도 하나도 생각이 안나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했다.


머릿말에 나오는 간디스토마 유충이 개미의 뇌를 조작해 조종하는 이야기는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부분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듣고, 의식하고, 기억하고, 믿는다. 똑같은 장면을 본 두 사람의 기억은 절대 완전히 같을 수 없다. 함께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서로 다르다. 빨간 약을 선택한 네오와 파란 약을 선택한 네오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 이론을 알기전의 나와 알고 난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것을 보고 의식한다.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의 나와 후의 나도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것들을 보고 배우냐가 뇌를 움직이는 어떤 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나의 뇌를 조종하는 '간디스토마 유충'은 과연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뇌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무엇일까? 확실한 건 박근혜를 조종한 '간디스토마 유충'은 최순실이었다. 그럼 최순실을 조종한 건 뭘까? 이 책을 다 읽으면 알 수 있으려나?


입맛이 없다


참 의욕이 생기지 않는 나날이다. 트위터는 각종 분야의 성폭력 사례로 폭발했고, 백남기 어르신에 대한 부검 영장 집행 때문에 또 계속 마음을 졸여야 했다. 일터에서 몸은 바쁜데 이상하게 일이 자꾸 꼬여서 잘 풀리지를 않고 있다. 마을에서 이런저런 급한 일들이 자꾸 들어오고, 나는 이런저런 일정에 치여서 뭐하나 똑부러지게 해내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최순실 게이트의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계속 담배만 피워댔다. 평소 일주일에 한 갑 가량 피우던 게, 요즘은 이틀에 한 갑 가량 피우고 있다. 물론 한창 담배를 피던 시절엔 하루에 한 갑 반 이상을 피웠으니, 비교하면 아직 양호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담배양을 확 줄인 몇 년 동안 이렇게 피운 적은 별로 없었다. 어제와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목이 아팠다. 그리고 며칠째 계속 입맛이 없었다. 뭘 먹어도 그게 맛있는 지도 잘 모르겠다.


점심에 입맛이 없어, 그냥 안 먹으려고 했는데, 옆 사무실에서 밥을 했다고 와서 먹으라고 하시길래, 숟가락을 얹었다.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먹을 때는 괜찮았는데, 다 먹고 돌아서니 소화가 잘 안되는 느낌이다. 이런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것도 스트레스 때문이려나. 뭐 그래도 저녁에 술 한 잔 들어가면 괜찮아지겠지.


저녁 약속이 있을 예정이었으나, 내일로 미뤄졌고, 5시에 회의에 참석하면, 아마 1시간 안에 마치고 뒤풀이를 갈 것이다. 거기서 배를 채우면서 가볍게 한 잔 하고, 친구나 후배를 불러 술을 좀 마셔야겠다.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날들이다.


※ 입맛이 없다는 내 문자에 친구가 오늘이 탕탕절이라고 탕수육이라도 먹으라고 했다. 탕탕절이 뭐냐고 물으니,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가 간 날이라고 탕탕절이라고. 그렇구나. 오늘이 그런 날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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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6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28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2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연속 충격 뉴스 접하느라 국민들은 입맛을 잃고 있는 중인데, 여당 사람들은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밥이 잘 넘어가고 있을 겁니다.

감은빛 2016-10-28 17:29   좋아요 0 | URL
네. 그 인간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밥 잘 넘어가겠죠.

samadhi(眞我) 2016-10-2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냄새 나는 아이를 안았을 때 기분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꽉 차죠. 아이가 내게 안겼는데 내가 안긴 듯한 포근함. 생명체의 거대함을 느끼죠.

감은빛 2016-10-28 17:30   좋아요 0 | URL
그래요. 내가 안긴 듯한 포근함.
아이를 매일 보지 못하게 되고 나니,
그 잠깐 아이를 안는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