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


토요일 아침에 잠을 깼더니 온몸이 다 아팠다. 어깨, 등, 허리, 엉덩이까지 기분 좋은 피로감은 아마 최근 다시 시작한 운동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팔목이 뻐근하게 아픈 이유는 잘 모르겠다. 잠시 멍하게 있다가 '아! 나 엊그제 이사했구나. 나 왜 이렇게 정신이 없는 거냐. ' 저 수많은 책들을 옮기고, 책장과 냉장고를 옮겨놓고, 게다가 이사한 집, 낯선 집에서 자고 일어나서 내가 왜 온몸이 뻐근한지 이유를 몰랐다니.


동네에서 평소 나를 아껴주는 선배가 세탁기를 사줬다. 이전 집에 있을 때부터 사주겠다고 했던 건데, 그땐 화장실에 놓을 공간이 애매해서 그냥 거절했었다. 여름엔 어떻게 손빨래를 하면서 버텼는데, 날이 쌀쌀해지고 몸이 바빠지니 도저히 세탁기 없이 살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사 하기 전날 선배가 주문했고, 이사한 다음 날 낮에 배송한다는 기사님의 연락을 받았다. 한창 바쁜 날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일하는 도중에 세탁기를 받으러 갔다.


버스에서 업무용 카톡과 이메일을 들여다보다가 안내방송을 듣고 부리나케 벨을 누르고 내렸다. 배송기사님이 거의 다 왔다고 하셨으니, 서둘러 가야지 생각하고 횡단보도를 향해 뛰었다. 길을 건너고 나서야, 잘못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내방송만 듣고 무심결에 이사하기 전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린 것이다. 새로 이사한 집은 거기서 걸어서 7분 남짓 거리이지만, 버스 정류장으로 치면 세 정거장이나 차이가 난다. (이상하게 정류장 사이 거리가 가깝다.) 이미 늦었기 때문에 3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다면 더 나았을텐데, 나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습관이란 게 참 무서운 거구나 생각하며 뛰기 시작했다.


많이 문제야!


다시 토요일로 돌아와 아직 풀지 못한 이삿짐 정리를 해야 하는데, 정말 하기가 싫었다. 전날 밤 술을 좀 많이 마시기도 했고, 몸이 뻐근하니 피곤하기도 했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한참 누워있다가 폰을 들여다보니 이런저런 연락이 많이 와 있었다. 그중에 새벽에 도착한 시민신문 편집장의 기사 교정 부탁이 있었다.


신입 기자가 쓴 기사인데, 자신은 도저히 손을 대지 못하겠다고 교정을 봐달라는 얘기였다. 익숙한 일이다. 벌써 여러 번 그런 부탁을 받고 글을 고쳐줬다. 이 신입 기자의 기사가 대체로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취재기자 출신인 편집장 입장에서는 글을 고치기가 난감할 거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냥 그 연락을 무시하고 누워 잠을 청했다.


전화가 왔다. 편집장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지금 교정을 볼 만한 상태가 아니예요. 전화를 무시하고 잠이 들었다. 점심때가 지나서 깼더니 전화가 여러 통 와있었다. 다시 울리는 전화. 더는 무시할 수가 없어 받았더니, 대뜸 바쁘냐고 묻는다. 늦게까지 술을 마셔서 피곤하다고 했더니, 기사를 봐달라고 부탁한다. 웬만하면 하고 싶은데, 지금 아직 술이 덜 깨서 도저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변명을 했더니, 밤까지 해주면 된다고 한다. 더 거절할 수가 없어서 뭐가 문제냐고 물었더니, "많이 문제야!" 라고 말한다.


노트북을 켜고 그 기사를 열어봤다. 아, 첫 문장부터 비문에다가 기사의 구조가 영 이상했다. 이 기사를 살리려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기사 안에 팩트가 부족했다. 자료를 더 찾아봐야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자료를 찾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거 제대로 쓰려면 하루는 부족할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노트북을 덮고 짐 정리를 시작했다.


저녁때 아이들이 오기로 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 좀 덜 어지럽게 정리를 하고 싶었는데, 몇 시간을 매달렸는데도 어지럽다는 측면에서는 그닥 나아진 것이 없었다. 애들엄마에게 연락했더니, 며칠 전에 조정했던 거 기억 안 나냐고? 오늘이 아니고 내일 가기로 했다고 한다. 아, 나 진짜 정신없이 살고 있구나.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배가 고팠다. 아이들이 오면 같이 밖에서 뭔가 맛난 것을 사 먹고 싶었는데, 갑자기 밖에 나가는 것도 귀찮아졌다. 주방을 정리해야 뭔가를 해먹을 수 있을 텐데, 씽크대가 너무 더러워서 싹 청소를 하기 전에는 정리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밖에 나가 밥을 사 먹고 와인을 사서 돌아올 생각이었다. 간밤에 소주를 많이 마셔서 오늘은 소주를 떠올리는 것도 싫었다. 여기저기 작은 구멍이 난 낡은 티셔츠에 시커먼 잠바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쓰고 나섰다. 


돼지국밥과 밀면


해장을 하려고 새로 생긴 순대국집에 들어가 순대국을 시켰다. 순대국은 서울에 올라온 후로 술 마신 다음날 주로 먹는 메뉴다. 부산에서는 거의 먹은 적이 없던 음식이다. 부산에선 주로 돼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이 나왔는데, 생각보다 별로였다. 문득 시장 어느 허름한 가게에 앉아 먹는 돼지국밥 생각이 간절했다. 


고향을 떠나 살면서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음식이 둘 있는데, 돼지국밥과 밀면이다. 못 먹으니까 더 간절한 건지는 몰라도 가끔 먹고 싶다고 생각이 들면 진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쩔 수 없이 순대국과 냉면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지만, 내가 진짜 먹고 싶은 건 이런 맛이 아니었어.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거 어쩌면 향수병이려나.


맛없는 순대국을 억지로 떠먹고 있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부산에서 막 올라온 길이라고 얼굴을 보자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보자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단다. 난 집에 가서 씻고 옷도 갈아입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아니 그 전에 나온 김에 새 집에 필요한 생활용품들도 좀 사야 하는데, 어쩌지 싶었다. 우선 물건들을 사러 갔다. 빨리 사서 집에 돌아가서 옷 만이라도 좀 갈아입고 다시 나와야지 싶었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고르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결국 친구가 도착해버렸다. 녀석은 내 몰골을 보더니 자기 평소 몰골이랑 비슷하다고 막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터라 이런저런 할 말이 많았다. 술자리는 길어졌고, 녀석은 결국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아직 짐 정리가 다 되지 않아 엉망이니 욕하지 말라고 했다. 녀석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게 무슨 엉망이냐고, 자기 집이 평소에 이보다 더 엉망이라고 했다. 너 생각보다 깔끔하게 사는구나 하길래, 아이들이 오가는 집이니 당연하다고, 오늘도 원래 애들이 올 예정이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정리를 해놓고 싶었는데, 다 못 끝낸 거라고 대꾸했다.


교정은 어려워!


집에서 또 맥주를 한참 마시다가 뒤늦게 시민신문 기사 교정 건이 떠올랐다. 편집장은 지금쯤 기사를 달라고 했는데, 어쩌나? 지금 다시 본다고 뭔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다시 기사를 열어봤다. 역시 손을 대기 어려웠다. 시민신문 기자 출신인 친구도 옆에서 그 기사를 함께 들여다봤다. 곧바로 기본이 안 되어 있다고, 저런 글은 고치기 어렵다고 한 마디 한다. 나는 그래도 고쳐볼 여지가 있는지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었다. 무리였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이 되어 있었고, 술이 그리 세지 않은 친구는 이미 주량을 채운 후, 자려고 누웠다. 나는 남은 술을 다 먹고 자려고 유튜브로 음악을 틀어놓고 홀짝이고 있었다. 새벽 2시 경이었던가, 편집장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노력을 했으나 도저히 안 되겠다고 설명을 했다. 편집장은 그래도 어떻게 안 되겠냐고 했고, 나는 왜 안 되는지를 설명했다. 통화가 길어졌다. 결국, 편집장은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지면을 채우기 위해 다른 글을 더 쓰던가, 이 글을 고쳐 쓰던가 해야 하는데,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한 편 화가 나기도 했다. 주말도 반납하고 신문을 내기 위해 기사를 쓰고 교정을 보는 편집장의 상황 때문이다. 그 새벽까지도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 편집장과 그 새벽 술을 먹다가도 기사 교정을 걱정하는 편집위원인 내 입장이 화가 났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다시 활동가의 삶을 살기로 마음 먹었을 때, 반 토막 난 급여를 채울 수 있는 건, 꾸준히 부업으로 외주 편집 작업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활동만으로도 시간은 늘 모자랐다. 야근과 주말 근무가 일상이었다. 외주 작업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시민신문 편집위원을 비롯해서 동네에서 뭔가 교정볼 일이 생기면 모두 나를 찾았다. 


지난주 원고를 넘겼던 소책자의 교정도 내 몫이었다. 일하는 시간을 쪼개 교정을 봐야 했다. 최근 또 하나의 편집 업무를 맡았다. 짧은 시간안에 완성해야 하지만, 인건비는 최소한의 비용만 책정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은 전문 편집자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이 일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가능하기도 하다. 해당 활동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편집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작업을 해야 할 10월 말에서 11월 초에는 업무상 무척 바쁠 예정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인건비가 책정되어 있으니,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겠지. 일을 맡은 이상 미리 걱정해봐야 소용없다.


※ 이 글을 써놓고 글에 교정 이야기가 있으니, 편집자들이 이 글을 읽고 비웃지 않을까? 자기가 쓴 글은 이렇게 엉망이면서, 무슨 교정을 본다고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교정을 보려고 했더니 머리가 아프다. 역시 교정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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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1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편집자가 겁나요..ㅎㅎㅎㅎ그 끝없는 지적과 까임...그래도 굳굳하게..ㅎㅎ// 네 이사하셨다니 몸살 날만도 하죠..
이사후 정리 다하고 안정될 때까지 거의 한 달 정도가 걸리는듯 하더라구요..^^..

고생하셨습니다..

감은빛 2016-10-26 14:27   좋아요 1 | URL
편집자는 꼼꼼해야 하고, 끊임없이 지적하고 요청해야 하는 사람이죠.
저는 편집자가 저자를 많이 괴롭힐수록 책의 질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

이삿짐 자체는 벌써 정리 했는데,
자잘한 것들을 찾기 쉽게 분류를 못하고 있네요.
큰 짐들을 다 풀어놓으니 작은 건 손대기 귀찮네요.

samadhi(眞我) 2016-10-2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이라 도저히 고칠 수가 없는 글 보면 난감하죠. 그냥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게 낫거더라구요.

감은빛 2016-10-26 14:2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안 나니까 문제예요.
이 글에 언급한 저 글은 내년에 다시 손 보기로 합의 했어요.
과연 내년에 할 여력이 될지는 모르지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