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는 법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돌아온 밤, 혼자 남는 밤은 허무한 기분이 든다.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와 어두운 집안에 불도 켜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혼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본다. 외로움과 허무함이 견딜 수 없이 밀려들면 다시 집을 나서 술을 사온다. 취해버리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것 같은 기분.
혼자가 되기 전에는 이렇게까지 허무하고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땐 그저 오래전 혼자 자취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냥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별로 달라진 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때도 일주일에 삼 일은 아이들과 함께 지냈고, 나머지 시간은 밖에서 모두 잠들때까지 술을 마시다가 들어갔다. 어쩌다 술자리가 생각보다 빨리 끝나면, 괜히 일찍 들어갔다가, 아직 잠들지 않은 애들 엄마와 마주치는 것이 싫었다. 그 어색한 순간이 견디기 힘들었다. 혹 술을 함께 마실 사람이 없으면, 혼자라도 술을 마시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갔다.
그래, 지금도 일주일에 삼 일은 아이들과 지낸다. 나머지 시간은 거의 술이다. 그건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이들이 돌아간 밤이 되면 이렇게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될 줄은 몰랐다.
마로니에 2집 테이프를 즐겨 들었던 때는 90년대 초였다. 좋아했던 노래는 A면 첫 곡이었던 <안개꽃 꽃말은 슬픔>과 B면 첫 곡이었던 <혼자 남는 법>이었다. 둘 다 황치훈의 노래였다. 그땐 아직 아픈 이별을 몰랐을 때였을텐데, 혼자 가슴 아픈 이별을 상상하며 <혼자 남는 법>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딱 이 노래다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곡이 없었던 이 테이프는 박학기나 윤상이나 공일오비의 테이프에 점점 자리를 내주고 먼지가 쌓인채 잊혀졌다. 그런 이 노래를 다시 떠올렸던 건, 이 집으로 이사 온 첫 날이었다.
무척 더운 날이었다. 함께 이사짐을 옮겨준 후배와 나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책장 세 개 외에는 가구도 하나도 없었고, 그저 짐이라곤 옷과 책 밖에 없었다. 아니 이불 몇 개를 챙겨나오긴 했구나. 책이 워낙 많아서 생각보다 짐을 옮기고 정리하는데 오래 걸렸다. 아니 책 정리는 제대로 하지도 않았다. 그저 제목도 보지 않고 꽂아두기만 했음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책장에 다 들어가지 못한 책들은 여전히 끈에 묶인 채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고생한 후배에게 고기와 술을 대접할 생각이었다. 짐을 대충 부려놓고 지칠대로 지쳐 고기집으로 가려는 때, 애들 엄마는 애들을 맡기고 약속이 있다고 갔다. 고기와 술로 배를 채우고 후배는 돌아갔고, 아이들을 다시 애들 엄마에게 데려다주고 혼자 텅 빈 방으로 돌아온 밤, 낯설기만 한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문득 이 노래가 생각났다. 가스도 아직 연결하지 않아 뭘 해먹지도 못했던 밤, 편의점에서 소주 두 병과 컵라면을 샀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조심조심 가져와 소주를 마셨다. 가구 하나 없는 방에서 바닥에 앉아 라면을 씹고, 소주를 들이키며,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검색해 이 노래를 들었다.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이제 난 정말 혼자구나.
손빨래
다른 필요한 물건들은 하나둘 장만했지만, 세탁기만은 사지 않았다. 일단 돈이 많이 들기도 하지만, 화장실이 좁아 세탁기를 놓고 나면 너무 불편할 것 같았다. 오래전 혼자 살 때에도 세탁기는 없었다. 그땐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번씩 손빨래를 했다. 여름 옷은 뭐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겨울 옷은 좀 힘들긴 했다. 가끔 빨래를 커다란 가방에 가득 담아, 부모님 댁에 가서 빨래를 해오기도 했다. 겨울에는 자주 그랬던 것 같다.
세탁기를 사주겠다는 선배가 있었다. 내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했다. 난 여름이라 아직은 괜찮다고 거절했다. 나중에 여름이 가고 날이 추워지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하는 손빨래는 재밌었다. 스트레스 해소에 최고였다. 비누 거품을 잔뜩 내고, 여러번 헹궈 깨끗해진 빨래를 보면 기분이 좋았다.
손빨래에 다시 익숙해지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곧 다시 예전의 노하우를 기억해냈다. 흰 옷, 비교적 깨끗한 옷부터 더러워진 옷, 짙은 색깔의 옷 순서로 비누칠을 하고, 대야에 넣어 거품을 잔뜩 내고 나서, 다시 같은 순서로 헹구기 시작한다. 대야에 받은 물이 더러워질 때까지 순서대로 하나씩 옷을 넣어 헹군 다음 꼭 짜고, 다시 깨끗한 물을 받아서 헹구고 짜기를 반복한다. 더이상 비눗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헹구면 마지막으로 물기를 짜내고 거실(이라기 보다는 개수대가 놓인 통로라고 불러야겠지) 바닥에 던져두고, 그 다음 순서의 옅은 색 옷부터 다시 헹구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면 물을 최대한 적게 쓰고, 시간도 훨씬 적게 들여 빨래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자고 가는 날엔 아이들의 속옷과 양말이 빨래더미에 쌓인다. 아이들의 겉옷은 엄마 집에 가져가서 빨아야 한다고 말한다. 속옷과 양말은 금방 빨수 있지만, 겉옷은 힘들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엔 반드시 반 바지를 입어야 한다. 비가 오는 줄 모르고 청바지를 입고 나갔다가, 다 젖은 그리고 흙탕물이 잔뜩 튄 청바지를 빨아야 했던 날엔 진짜 힘들었다. 그 옛날 군대에서 군복 빨던 때가 생각났다. 요즘은 군대에도 세탁기가 있다던데, 당시엔 사병이 세탁기를 사용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두꺼운 야전 상의도 모두 손빨래를 해야 했다.
빨래는 거의 밤에 했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크게 켜놓고 한 두세시간 빨래를 하고나면 거의 녹초가 된다. 하지만 깨끗해진 빨래를 널어놓고 나면 어떤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느껴진다.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만큼 지쳤지만, 기분은 좋은 상태로 잠들 수 있다.
술에 취하지 않아도 지쳐 쓰러질 수 있으니 빨래는 좋은 것이구나. 하지만 이 짓도 하루이틀이지. 이젠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슬슬 긴 바지와 긴 팔 상의가 빨래로 나올 때가 되었다. 날이 더 서늘해지기 전에 세탁기를 사야 할 때가 되었다 싶다. 다음 달 중순 다시 이사를 하고 나면 꼭 세탁기를 사야겠다.
가사노동
집안 일은 귀찮고 힘들다. 밥과 반찬 만들기, 설겆이, 청소, 빨래 어느 것 하나 편한 일이 없다. 아이들이 오지 않는 날, 혼자인 날은 그런 집안 일을 최소한으로 하려고 노력한다. 밥 그릇에 반찬을 함께 담아 먹기도 하고, 다행히 땀을 많이 흘리지 않은 날엔 냄새를 맡아보고 괜찮겠다 싶은 옷은 창가에 걸어두었다가 다시 입기도 한다. 아니 혼자인 날은 밥을 잘 해먹지 않는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밖에서 먹고, 저녁도 주로 술과 안주로 배를 채운 후에 돌아온다.
아이들이 오는 날엔 어쩔 수 없이 밥도 해야하고, 반찬과 국도 만들어야 한다. 설겆이도 훨씬 더 많이 나온다. 빨래해야 할 옷도 더 많다. 어떤 날엔 기분 좋게, 빠르게 집안 일을 해내지만, 대개는 귀찮은 마음에, 하기 싫은 마음에 일을 미룬다. 더이상 꺼낼 그릇이 없거나, 더이상 신을 양말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마음을 먹고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사를 나가기 위해 집을 내놓았을 때에는 꼬박꼬박 설겆이도 하고, 빨래도 해야 했다. 청소도 자주 해야 했고, 쓰레기도 자주 비워야 했다. 매일 아침 이불 속에서 몸만 빠져나와 씻고 출근했지만, 이젠 낮에 내가 없는 동안 누군가 집을 보러 와서, 이불이 그대로 펴진 방을 보고 욕을 할 것 같았고, 개수대에 쌓인 그릇들과 화장실 입구에 쌓인 빨래감을 보고 욕을 할 것 같았다.
매일 끝없는 집안 일을 하는 건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다. 어차피 누군가 대신할 사람도 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니 마음을 고쳐 먹고, 기분 좋게, 미뤄두지 말고 집안 일을 하자. 그게 내가 나를 돕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