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핵폭발 사고 3주기
3월 11일은 후쿠시마 핵폭발 사고가 일이난지 3년이 되는 해다. 페이스북에 지인이 쓴 글을 보니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에 후쿠시마에서 대지진이 일어났고, 곧이어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왔으며, 쓰나미는 핵발전소를 덮쳐고, 핵발전소는 물에 잠겼다. 전기가 끊어졌고, 끊임없이 냉각수를 순환시켜 식혀줘야 할 핵 연료봉의 온도가 올라갔고, 결국 차례로 핵 폭발 사고가 일어났고, 어마어마한 방사능이 유출되었다. 방사능은 바다로, 하늘로, 땅으로 퍼져나갔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던 농부들은 평생 일궈왔던 땅을 잃고 쫓겨나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부피폭과 외부피폭의 피해를 입었다.
도쿄전력과 일본정부는 처음부터 계속해서 사고 규모와 방사능 유출량을 감추고, 축소 발표해왔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이 사고를 잘 수습,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외부의 핵 전문가들은 이미 멜트다운(핵 연료봉이 지반을 뚫고 내려가는 현상)이 진행되었다고 추측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후쿠시마는 죽음의 땅으로 남아있고, 방사능 유출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죽음의 땅으로 남을 것이다.
역사상 최악의 핵폭발 사고가 일어난 지 3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 땅에는 핵 발전소가 돌아가고 있고, 또 새로 짓고 있으며, 심지어 수명이 끝난 낡은 핵 발전소를 제대로 된 검증없이 다시 돌리고 있다. 한편 안전을 위해 사소한 부분까지도 철저하게 신경써야 할 핵 발전소에 불량부품을 쓰고, 돈을 횡령하는 등 온갖 비리가 일어났음에도, 이러한 사실들이 밖으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친일 청산 문제도 그렇고, 독재 미화 문제도 그렇고, 온갖 환경파괴 문제도 그렇지만, 핵 발전에 대한 문제를 들여다봐도 역시 우리는 도통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아마도 국민들은 제대로 배우고, 올바른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가 자신의 이익에 눈이 멀어 배우려고 하지 않는 거겠지. 이 땅의 친일파, 군부 독재의 수혜자들, 돈에 눈이 먼 기업들, 핵 마피아들이 이 나라를 배우지 못하는 나라로 만들어 가고 있다.
3월 8일 시청 앞에서 열린 후쿠시마 3주기 탈핵 집회에서 김익중 선생은 "탈핵은 세계적인 추세이며, 유행이다."라고 했다. 핵 발전은 안전하지도 않고, 경제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서구 국가들은 핵 발전 비중을 줄여나가고 있고, 후쿠시마 사고 이후 몇몇 국가들은 단계적으로 핵 발전소를 폐기하여, 일정 기간안에 완전히 핵 발전에서 벗어나는 탈핵 선언을 했다. 김익중 선생은 우리나라만 유독 세계적인 유행에서 벗어나 혼자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언젠가는 대세를 따르게 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 지금 중국에 지어지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핵 발전소 건설 상황을 보면, 우리 뿐 아니라 중국도 유행에 뒤처져 있다. 일본 역시 그런 생지옥을 겪고 있으면서도 한쪽에서는 여전히 핵 발전을 고수하려고 한다. 어쨌거나 한, 중, 일 3국이 김익중 선생의 말씀처럼 부디 세계적 유행에 따라 탈핵 결정을 내려주길 간절히 바라며, 그 결정이 대재앙이 될 핵 폭발 사고가 또 일어나기 전에 내려지길 바란다.
최근에 나온 탈핵 도서들을 갈무리해본다. 작년까지 사모은 탈핵 관련 도서들도 제대로 다 읽지 못했는데, 읽어야 할 책들은 자꾸 늘어나는 구나.
마음의 파멸
3월 8일 토요일에는 청계광장에서 여성의 날 행사가 있었고, 시청 앞에서 탈핵 집회가 열렸다. 아이들을 데리고 시청을 향해 가면서 누군가의 메시지를 받았다. 노동당 부대표의 부고 소식이 있다고, 처음에는 부고라고 해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인 줄 알았다. 부대표가 누구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사람 이름을 못 외우는 불치병에 걸린 주제에 그걸 어떻게 기억해내겠는가 싶어, 버스에서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봤다. 그런데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가 '노동당 부대표 박은지'였다. 박은지라면 익숙한 이름이다. 예전에 진보신당이었던 시절 대변인이었고, 직접 인사를 나눈 적은 없지만, 집회에서 여러번 스쳐갔던 인연이며, 최근에는 페이스북을 통해 소식을 자주 접했던 사람. 어떻게 이 사람이 검색어 1위가 될 수 있지? 한편으로 이상하다 느꼈고, 또 한편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부고처럼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클릭해서 읽은 내용은 충격이었다. 박은지 씨가 자살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아, 젊은 패기와 미모를 겸비한 당찬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자살이라니!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나다를까 시청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에서 왠지 그늘이 느껴졌다. 다들 선뜻 말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듣고 마음이 무거운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나도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말했듯이 인사 한 번 나누지 못한 사이였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죽음의 영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장애인이자 장애인 인권 활동가인 아버지의 딸이었고, 기간제 교사였으며,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으며, 사회 운동에 뛰어든 활동가였고, 소수 정당의 정치인이었다. 이 모든 요소들을 늘어놓는 순간, 아득한 느낌이 든다. 대개 이 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여 자살 충동을 느낄수도 있을 터, 그의 삶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웠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언론에서 우울증 얘기가 나왔다. 경박한 언론은 그의 삶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고인의 명예를 깍아내리는 추측성 짧은 기사를 쏟아내면서 검색어 1위의 덕으로 페이지 뷰를 올리려고 애썼다.
토요일 집회 뒤풀이에서도, 일요일 강연 뒤풀이에서도, 어제 지인과의 술자리에서도 계속 그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묘한 일이다.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저 페이스북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를 전해 들었건만, 그의 죽음 이후에 오히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많은 얘기들을 전해 듣는다.
그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떠오른 건, 스테판 츠바이크의 [마음의 파멸]이란 단편소설이다. 군대를 가기위해 학교를 휴학했던 시절에 읽었는데, 당시 어떤 책에서 이 글을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글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건, 한 사람이 어찌보면 별 것도 아닌 일로 얼마나 철저하게 무너져가는지를 매우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두운 면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청소년 시절을 남들과 다르게 보냈고, 덕분에 많은 일을 겪었다. 게다가 예민한 성격이라 쉽게 상처 받는 편이었다. 수없이 많은 자살충동을 느끼며 살았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큰 교통사고로 죽는 상상을 하고, 다리를 건너다가 뛰어내리는 상상을 하고, 새벽에 길을 걷다가 빠르게 달리는 차량으로 뛰어드는 상상을 하곤 했다. 당시 썼던 일기에는 유독 자살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저 [마음의 파멸]이란 작품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고, 읽고 또 읽었다. 그 책에 수록된 다른 유명한 작가들의 단편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 하지만, 저 작품 하나만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사춘기를 지나서도 나는 자살충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자의식이 강하고, 상대의 반응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생겼고, 그런 문제들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해 늘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상황은 스트레스가 되어 나를 짓눌렀고, 달리 그걸 풀지 못해, 늘 술로 마음을 달랬다. 술은 또 사람을 감정적으로 만들고, 그 감정(슬픔, 우울, 분노 등)은 나를 집어 삼켜버리곤 했다.
지금 나는 한때 같은 깃발 아래서, 같은 구호를 외쳤던 동지의 죽음을 보면서, 한편으로 내 마음을 들여다 본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더 열심히 살라고 말을 하는데, 나는 죽음을 택하는 용기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의 죽음이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사실 생각으로는 수없이 해 봤지만, 현실에서는 그 만큼의 용기를 내지 못했다. 역시 나는 그 정도의 용기가 없는 그런 인간이다. 그저 내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 봐야겠다.
덧, [마음의 파멸]을 다시 한번 읽고 싶은데, 검색해봐도 그 작품이 수록된 책을 찾지 못하겠다. 혹시 아시는 분 계시면, 제보를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