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바지

 

더위과 장마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내게 반바지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무더운 날에 긴바지를 입고 출근하면 일단 답답하고 땀이 찬다. 움직임이 많지 않은 날엔 그래도 견딜만하지만 많이 돌아다녀야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곤욕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의 선택은 반대여야 한다. 사무실에 앉아만 있는 날에는 반바지를 입어도 뭐라할 사람이 별로 없지만, 외근을 나가야 할 날에 반바지를 입고 나갔다간 당장 거래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게 틀림없다. 아니! 상의는 여름이라고 반팔을 입으면서 바지라고 반바지를 못 입을 건 또 뭔가? 비오는 날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늘 아침처럼 그야말로 억수같이 퍼붓는 날에는 신발과 양말과 허벅지 아래 바짓단이 모두 젖는다. 뻔히 젖을 것을 알고도 긴바지를 입어야할까? 그냥 간편하게 반바지에 샌들 신고 가면 안되는 걸까? 오늘은 잠시 고민하다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바지와 샌들을 신고 출근했는데, 반바지의 3분의 2가 다 젖은 채로 사무실에 도착했고,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옷이 말랐다. 만약 긴바지였다면 퇴근시간이 다 된 지금까지도 옷이 덜 말랐을지도 모른다.(물론 옷의 소재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날엔 DJ. DOC의 노래 '반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텐데~'라는 노래가 자꾸 생각난다. 물론 요즘은 '쿨비즈'라고 말하면서 넥타이도 풀고, 양복(수트)을 입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데, 일반적인 회사에서 반바지까지 허용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정부와 한전이 워낙 '예비전력'을 강조하고, 에너지 절약을 부르짖은 덕분에 생긴 바람직한 변화라고 보는데, 여기에도 나름의 맹점은 보인다. 이 맹점은 실천의 지점이 아니라 전력산업의 구조 때문에 생기는데, 이 부분은 다음에 자세하게 한번 짚어보고 싶다. 일단 오늘은 패쓰!

 

반바지 얘기를 하면 늘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어느 중소도시의 환경단체 활동가로 일하던 시절이다. 여름이었다. 당연히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습한 날씨에 빨래를 자주 하지 못해 옷이 부족해서 하필이면 후즐근하게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갑자기 시청 문화국장과 중요한 면담이 잡혔다. 옷차림이 맘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집에 다녀올 여유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대로 시청을 방문했다. 당연하겠지만 문화국장은 제법 나이가 있는 분이었다. 나는 문화국장을 만나기전부터 문화국 공무원들에게 눈총을 받기 시작했는데, 문화국장과 둘이 마주 앉으니, 국장은 무척 황당해하며 내 옷차림을 노골적으로 쳐다본다. 나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그는 이미 나를 정상적인 대화상대로 두고 있지 않았다. 마치 학생 다루듯 하대하는 태도가 눈에 보였다. 조금 대화를 시도하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표정을 바꾸었다. 다음 순간 나는 강한 어조로 태도를 바로하고 면담에 임할 것을 요청했다.

 

나는 지금 정확한 용무를 갖고 시청 문화국장과 면담을 하러 방문한 시민이지, 당신 부하직원이나 친인척이 아니다. 당신이 나를 하대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이는 공무원 복무규정에 어긋난다. 제대로 자세를 갖춰 면담에 임하지 않는다면 이 면담은 없었던 것으로 할 것이며, 동시에 공무원으로서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뭐 이런 말들을 쏟아내고 나니, 그는 아주 당황한 표정을 보였고, 이후에는 딱 해야할 말만 무뚝뚝하게 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 상대에 따라 기본적으로 옷차림을 갖춰야 할 필요는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옷차림만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무시하는 언행은 부당하다. 그리고 그 옷차림의 기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름에 반바지를 입고 여기저기 거래처를 다니면서도 눈치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민어복달임

 

모 동물권단체 활동가로 있는 지인과 만날 약속을 잡다가 곧 다가오는 중복에는 저녁 늦게까지 정신없이 바쁘다는 말을 들었다. 복날엔 그냥 대박으로 바쁜 날이라고 했다. 그렇구나! 그쪽 단체는 그 날이 피크타임이겠구나. 모르고 지날 뻔 했는데, 덕분에 중복이 언제인지 알게 되었다. 최근에 만난 어느 선생님은 복날에는 '삼계탕'이나 '보신탕' 보다는 '민어복달임'이 더 맛있고 몸을 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옛부터 삼복더위에 양반은 '민어'를 먹고, 상놈은 '보신탕'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민어는 평소에는 구경하기 힘들고, 제삿날에야 겨우 한번 접할 만큼 귀하고 비싼 생선이다. '민어복달임'이란 말은 김준 박사님의 [바다맛 기행]에서 처음 보았는데, 직접 먹어본 사람을 만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과연 양반들만 먹었다는 그 민어복달임이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복날에 삼계탕을 끓여 주셨다. 집을 나와 혼자 살면서부터 복날을 따로 챙겨 본 적은 별로 없는데, 대개 모르고 지나갔거나, 알았더라도 가난한 자취생이 삼계탕과 같은 비싼 음식을 먹을 여유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아, 한번은 근처에 자취하는 선배 두어명과 함께 저 멀리 농협 하나로 마트까지 걸어가서(버스비는 있었으나 버스노선이 없었고, 택시는 있었지만 택시비는 없었다.) 생닭과 마늘 등 재료를 산 후 다시 먼 길을 걸어와서 삼계탕을 끓여 먹은 적이 있었다. 나는 물론이고 선배들 모두 삼계탕을 끓여본 경험은 없었다. 게다가 가스레인지도 없는 집에서 휴대용 버너를 이용했고, 마땅한 큰 냄비가 없어서 코펠에 넣어 끓였다. 맛은? 뭐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냥 그저 삼계탕을 먹는 다는 것 자체의 의미를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무더운 복날 재료를 마련하려고 먼 길을 장보러 갔다 오면서 흘린 땀이 엄청났기에 효율로 따지면 차라리 안 먹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보신탕은 거의 먹어보지 못하다가(친척들 모였을 때 맛만 본적이 있었다.) 잠시 농사짓는 마을 빈 집에 살던 시절에 여러 번 먹었다. 그땐 일 때문에 여러 마을 어른들과 교류가 있었다. 여름에는 마을마다 서로 다른 날에 수시로 개를 잡는다고 했다. 그래서 어제는 ㄱ마을에서 보신탕을 얻어먹고, 오늘은 ㄴ마을에서 얻어먹고, 내일은 ㄷ마을에서 또 얻어먹는 식이었다. 그해 여름에 평생 먹어본 것보다 많은 아니 앞으로 평생 먹을 양보다 더 많은 보신탕을 먹었다.

 

어쨌거나 중복을 맞아 무언가를 먹거나 혹은 안먹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민어복달임이 뭔지, 그렇게 맛있다는데 한번 맛이라도 보고 싶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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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3-07-2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들 교복을 반바지로 만들어 주면 좋겠어요. 남학생들은 긴바지에 허덕이고, 여학생들은 치마 속 안감이 무척 더워서 또 힘들어 하거든요. 반바지를 교복으로 입는 학교도 있다 들었는데 보지는 못했어요. 저도 반바지 입고 출근하고 싶어요.(>_<)

감은빛 2013-07-24 17:01   좋아요 0 | URL
저도 반바지 교복이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보지는 못했네요.

여학생들 치마는 좀 시원할 줄 알았더니 안감 때문에 덥군요.

학교 선생님들도 반바지를 못 입게 하나요?
교장 선생님(혹은 교감)이 무척 보수적인가보네요.
안타깝습니다!

조선인 2013-07-23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여름에 남자들은 긴바지에 와이셔츠 입고 있는 거 보기만 해도 더워요. 게다가 남자들은 실컷 껴입고 에어컨을 있는대로 틀어대니 여자들은 오히려 가디건 덧입고 이런 낭비가 없지요.

감은빛 2013-07-24 17:03   좋아요 0 | URL
그죠? 저 처럼 반바지입고 일하면 에어컨 덜 켜도 될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노출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여성들이 부러운 계절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07-23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어는 목포나 신안에서 많이 먹어요.민어가 고급생선이긴 하죠.목포에는 민어전문점들이 있어서 맛기행 같은 방송에 가끔 언급됩니다.

감은빛 2013-07-24 17:09   좋아요 0 | URL
네, 저기에 언급한 [바다맛 기행]에서는
태이도(신안군 임자면 타리섬) 일대에서 많이 잡힌다고 하네요.
일제 시대에 민어 파시가 들어섰던 얘기도 언급하구요.

언제 목포가서 민어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blanca 2013-07-24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 양복 입은 것 보면 너무 더워 보여요. 저번에 뉴스에서 사무실에 반바지 차림도 괜찮다고 하니까 어떤 분이 인터뷰로 사십 넘으면 반바지 입기 좀 뭣하다,는 이야기에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좀 다들 시원하게 눈치 안 보고 편하게 입는 문화가 형성되면 좋을 텐데요. 우아, 민어복달임은 어떤 맛일까요?

감은빛 2013-07-24 17:12   좋아요 0 | URL
제 주위엔 사십이 아니라 오십이 넘어도 반바지 입고 다니는 분들 많은데,
물론 반바지를 입고 출근할 때는 좀 민망할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의식이 바뀌면 괜찮지 않을까요?

저도 민어복달임이 무척 궁금합니다.
복날은 지났지만 꼭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