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기 바람이 이마를 스친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살짝 움직였다. 좀 더 시원하게 불어줬으면 좋으련만 야속한 바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나무 그늘에 앉아 있어도 피부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듯한 후덥지근한 느낌은 그대로다. 쎄~ 하고 매미 우는 소리가 시끄럽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떠보고, 자세를 고쳐봐도 영 잠은 오지 않는다. 잠들기에는 너무 덥다. 어디 시원한 에어컨 바람 밑에 누웠으면 좋겠다. 아니면 어디 바닷가 파라솔 아래 누워 썬글라스 너머로 어여쁜 여성들의 몸매 감상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여름이라고 어디 놀러 가 본게 언제였던가? 남들은 사무실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거나, 바닷가에서 휴가를 즐길텐데, 나는 바람 한 점 없는 폐교 운동장 구석에서 시끄러운 매미 소리나 듣고 있다니!
"아야, 슬슬 일 시작해야."
더러운 수건을 목에 두른 장씨 아저씨가 저쪽에서 담배를 물고 걸어온다. 점심은 제대로 드시지도 않고, 막걸리만 열심히 드시더니 본관 건물 뒤쪽 그늘로 자러 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술이 다 깨셨나? 담배를 입에 물고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아직 술기운은 그대로 인듯하다. 어쨌거나 사수가 부르는데, 부사수가 누워있을 순 없으니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팔다리 근육이 쿡쿡 쑤신다. 저절로 비명 소리가 새어 나온다. 나무 그늘을 벗어나니 뜨거운 햇살이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다. 작업복인 긴팔셔츠를 걸쳐 입으며 비틀비틀 아저씨를 따라 걸었다.
장씨 아저씨는 아이스박스에서 시원한 얼음물이 든 병을 꺼내 얼굴과 목 뒤에 문지른다. 시꺼먼 땟국물이 물병에 묻는다. 그 물병을 겨드랑이 틈새에도 넣었다가 빼고, 배와 가슴도 문지르고 나서야 뚜껑을 열어 물을 마신다. 다 마신 물병을 내게 건네려 하길래 황급히 손사래를 치고 한발 물러섰다. 물병을 내려놓은 아저씨는 어기적어기적 철망 쪽으로 걸어가더니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싼다. 세찬 오줌 줄기가 땅바닥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목장갑을 끼고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린 뒤, 오함마의 손잡이를 끌고 오전에 부수다 만 벽을 향해 다가갔다. 곡괭이질과 함마질의 원리는 비슷하다. 팔 힘이나 어깨 힘으로 치는 것이 아니다. 곡괭이나 함마가 그리는 포물선의 운동 에너지를 한 점에 모으는 것이다. 그래서 요령 없는 근육질 젊은이보다 팔다리는 가늘고 배만 나온 아저씨가 훨씬 더 벽을 잘 부술 수도 있다. 물론 무거운 오함마를 휘두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근력이 필요하다. 힘이 없으면 겨냥한 곳이 아닌 엉뚱한 곳을 치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관절이 받는다. 어깨나 팔꿈치를 다칠 수도 있다.
(하나. 둘.) 퍽! 부스스. (하나. 둘.) 퍽! 부스스. 속으로 구령을 붙여가면서 함마를 휘두르는데 좀처럼 힘이 한 점에 모이질 않는다. 그러니 벽도 금이 가거나 부서지지 않고, 표면만 깨지면서 가루가 떨어진다. 요령을 익히려면 더 많이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어쨌거나 힘으로라도 이 벽을 부수고 만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장씨 아저씨가 쯧쯧 혀를 차며 다가온다.
"아야. 비켜봐야"
딱 봐도 나보다 왜소한 체격의 아저씨는 내 것보다 더 크고 무거운 오함마를 끌고 와서 휘둘렀다. 쩡! 마치 벽이 함마를 빨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벽에 금이 간다. 쩡! 정확하게 같은 자리를 가격하니 앞서 생긴 금이 더 멀리 뻗어갔다. 퍽! 와르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같은 자리를 때리니, 큰 벽돌 조각들이 우루루 무너져 내렸다.
나보다 동작도 작고, 그리 큰 힘을 쓰는 듯 보이지도 않는데 내가 열 번 친 것보다 더 크게 무너졌다. 아저씨는 다시 혀를 끌끌 차면서 나를 한번 흘겨보고는 반대편 벽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질질 끌고 가는 오함마의 자국을 따라가다가 바닥에서 뭔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걸 보았다. 다가가 주워보니 작은 금속 조각이었다. 뒤집어보니 무슨 요정이거나 마법공주의 지팡이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 가방에 장식으로 달려있다가 떨어졌을 것이다. 과연 조그만 이 마법 지팡이가 여기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 학교가 폐교되기 전이었을 테니, 벌써 여러 해가 흘렀겠지, 그때 여기서 이걸 잃어버린 아이는 지금쯤 훌쩍 자라있겠구나.
몇 번 휘두르지 않았는데, 벌써 지쳐버려 아이스박스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잠시 쭈그려 앉았다. 아저씨도 저쪽에서 잠시 함마를 내려놓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점심시간 동안 잠시 말랐던 옷이 다시 땀으로 흠뻑 젖었다. 포크레인이 잠시 작업하면 끝날 일일 텐데, 왜 우린 이 더운 날 이렇게 땀을 빼고 있어야 하는 걸까? 이 작은 창고 하나를 굳이 부수는 이유는 뭘까? 내 노동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궁금한 점은 많았지만, 우리에게 창고를 부수라고 지시하고 떠난 사내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일당은 나중에 인력사무실에서 받을 테니까.
"어여 해야. 쫌 이쓰먼 트럭이 올테니께"
한두 시간 후면 철거된 벽돌과 콘크리트 덩어리를 치우러 트럭이 올 것이고, 우린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 작은 창고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싹 치워놓고 돌아가야 한다. 뜀틀과 쿠션, 축구공, 배구공 따위가 들어 있었을 작은 창고는 나와 아저씨의 함마질에 사라질 것이다. 누군가의 낙서와 누군가의 손때와 누군가의 추억이 조금씩 무너지고 부서지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던 그 무더운 여름날의 막노동으로 나는 일당 6만 5천 원을 받았고, 양쪽 손바닥에 물집이 생겼으며, 이틀간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어야만 했으며, 등과 허리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여야 했다. 아, 그리고 이때 생긴 땀띠로 여름 내내 고생했단 것도 기억해두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