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낮술 그리고 술 

화요일, 그러니까 5월의 마지막 날 아침,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아침부터 비는 내리고,
늦게까지 마신 술은 아직 깨지 않은 듯.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본다.

바람에 묻어오는 비 냄새가 좋다.
빗물 받이에 똑똑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좋다.
비를 맞고 서 있는 저 나무처럼 흠뻑 젖어보고 싶다.

5월의 마지막 날.
돈 나갈 일은 많은데,
들어올 돈은 없다.

좋았던 기분이 금새 우울해진다.
걱정해봐야 답은 없다.
그냥 계속 기분만 가라앉을 뿐.

이런 날엔 낮술이나 한잔 하고 싶다!

마침 그날 저녁에 술 약속을 해놓았던 한 선배가 이 글을 보았다. 그 선배는 '점심 맛난거 먹고, 저녁에 일찍 만나서, 많이 마시자'는 댓글을 남겨주셨다. 평소 아무도 신경안쓰는 내 페이스북인데, 마침 그 선배가 이 글을 읽은 건 좀 신기한 일이다. 

솔직히 진짜 낮술이 마시고 싶었다기 보다는 그냥 기분이 그랬다는 뜻이었다. 전날 마신 술이 아직 덜 깨서 머리가 멍한 탓도 있었고, 여러모로 기분이 그랬다. 비와 통장잔고와 일터의 상황 등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낮술을 한잔(정말 딱 한잔!) 마시게 되었다. 

오전 내내 일터의 좀 복잡한 상황을 놓고 논의가 있었는데,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야기는 길어져서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다. 결국 일단 논의를 마무리하고 밥을 먼저 먹기로 했는데, 비도 오고 뒤늦게 나가기도 귀찮아서 시켜먹기로 했다. 자주 먹는 중국음식점에 식사를 주문하면서 사장님이 '이과두주'를 한 병 시키셨다. 딱 한 잔씩만 먹을 분량. 배를 채우기 전에 먼저 독주를 부었더니, 캬~!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오후 업무를 마치고 퇴근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선배를 만나러 갔다. 선배는 나를 배려하여 '컨디션'까지 챙겨놓고 계셨다. 그리고 열심히 또 즐겁게 술을 마셨다. 

둘. 전집 강매 

아마 두 달쯤 된 것 같다. 큰 애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일주일에 1권씩 그림책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대신 한 달에 만원을 내라고 했다. 대형 출판사에서 내는 전집 시리즈 였다. 아마 어린이집들과 출판사측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는 대목이다. 어린이집은 부모들에게 생색내기 좋고, 부모들은 싼 가격에 정기적으로 책을 받아서 좋고, 아이들은 일주일마다 새 책을 읽어서 좋을거라고 생각했을 게 뻔하다. 

문제는 책이 정말 별로라는 거다. 지금까지 아이가 받아온 책들을 하나하나 다 살펴봐도 아무런 내용이 없다. 대체 왜 이런 쓰레기 같은 책을 만들었을까? 나무가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쓰레기 같은 허접한 책을 한 달에 만원이나 주고 정기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이 났다. 나와 아내는 돈을 안내고, 책을 안받기로 합의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큰 애였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책을 받는데, 혼자 책을 받지 않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는 너무너무 책을 받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냈고, 아이가 받아 오는 재미도 없고, 내용도 없는 책을 억지로 읽어줘야 했다. 

가장 화가 나는 건, 아직 어린 아이들이 전집 강매의 희생양이 된다는 사실이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스스로 양식있는 교육자라면 이 점을 깨달아 줬으면 좋겠다.

셋. 우리 아빠 어딨어? 

해마다 봄, 가을이 짧아지는 느낌이다. 올해는 유난히 더 봄이 짧았던 것 같다. 5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마치 여름 날씨같은 더위가 이어졌다. 낮에 땀을 흘릴며 돌아다니다보니, 긴 머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머리가 예쁘게 길러지지 않고, 자꾸만 삐쳐나오는 모양새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예전에도 몇 번이나 머리를 길러보려다가 이쯤에서 포기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덥수룩한 옆머리와 뒷머리가 영 거슬려서 동네 남성전용 미용실을 찾았다. 숫기 없고, 불친절한 젊은 남자가 운영하는 곳이다. 가위질 솜씨가 좀 있는 것 같고, 머리를 자르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약간의 친절함과 사교성만 갖추면 좋을텐데.... 

긴 머리가 좀 지겨웠고, 여름이라 시원하게 잘라달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다 되었다는 남자의 말을 듣고 거울을 보니 앞머리와 윗머리가 너무 짧았고, 뒷머리는 그에 비해 또 별로 짧지 않았다. 아, 나는 이런 스타일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이미 짧게 잘라버린 머리를 다시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머리를 감고 거울을 보니 무척 낯설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다. 한 일주일쯤 면도를 하지 않고 수염을 길렀는데, 짧은 머리에 수염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 깔끔하게 면도를 해버렸다.

그래도 시원하게 잘 잘랐다고 생각하고(아니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내는 큰 애를 데리고 친구를 만나러 갔기 때문에, 오늘 저녁엔 작은 애랑 놀아주면 된다.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를 만났는데, 녀석이 평소와 달리 아빠를 보고도 별 반응이 없다. 평소에는 나만 보면 아주 좋다고 웃고, 온몸을 들썩이며 어서 안아달라고 보채곤 했는데, 오늘은 웃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흘끔 한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유모차를 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이는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아이 이름을 불렀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본다. 평소 잘치던 장난도 쳐보고, 이런 저런 말을 걸어봐도 계속 반응이 없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 모습이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덥수룩하게 긴 머리에 수염까지 길렀던 아빠가 갑자기 완전히 바뀐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못알아보는 것도 당연한건가. 

집 앞에서 아이를 안고, 유모차를 접어서 들고 계단을 올랐다. 평소엔 아이를 안으면, 녀석도 나를 껴안으며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토닥 하는데, 오늘은 그것도 없다. 집에 들어서서 가방을 벗고 옷을 갈아입는데, 녀석이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낯선 사람과 단 둘이 있다는 사실때문인 것 같았다. 우는 아이를 안고 아무리 아빠라고 얘기해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장난도 쳐보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마치 '우리 아빠 어딨어? 우리 아빠 내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뭐라고 옹알이를 해가면서 울었다. 얼굴을 안보면 조금 낫겠지. 이 더운날 아이를 등에 업고, 반찬을 만들었다. '제철 꾸러미'에서 보내준 아욱과 뽕잎을 씻고, 다듬어서 살짝 데친 후에 참기름 넣고 무쳤다. '제철 꾸러미'가 나물이나 야채를 보내줘서 좋긴 한데, 씻고 다듬는데 손이 많이 가서 조금 귀찮다. 나물을 맛있게 무치는 건 자신있는데, 나물을 씻어서 다듬는 건 정말 귀찮다. 등에 매달린 아이의 울음은 서서히 잦아들다가 멈췄다. 반찬 만드는데 집중하다가 문득 너무 조용해서 보니, 어느새 잠들어 있다. 대충 반찬 만들기를 끝내 놓으니 다시 아이가 깨서 울기 시작한다. 아이를 내려서 품에 안고 밥을 떠먹이면서, 부지런히 내 입에도 밥을 퍼넣었다. 아이는 울면서도 밥은 받아 먹었다. 먹으면서도 자꾸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누군데 나한테 밥을 주나 하는 표정이다. 한참을 받아먹다가, 어느정도 배가 찬 모양인지 밥을 외면하고 다시 울기 시작한다. 평소라면 웃으면서 좀 더 먹었을텐데, 기분 탓에 더 안먹을 모양이다. 

자꾸 우는 아이를 달랠 길이 없어서 결국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머리를 잘랐더니, 아기가 아빠를 못알아보고 자꾸 울어요' 한참 후에 예정보다 조금 일찍 출발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가 좋아하는 동요를 틀어주기도 하고, 안고 방안을 뱅글뱅글 돌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은 이 상황에 익숙해진 듯 울음이 줄어들었다.  

아이는 엄마와 언니가 돌아오고 나서야 평소처럼 활발한 장난꾸러기로 돌아왔다. 그래도 여전히 나를 경계하고 낯설어하는 느낌은 남아있었다. 요 아빠도 못 알아보는 녀석아! 며칠이나 지나야 다시 아빠를 알아볼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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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6-0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집이 연계되어 전집을 제공한다니...좀 안타깝네요.
저도 아이들 책을 단행본으로 읽힌 이후부터 전집을 보면 얼마나 화가 나는지...
대량으로 묶어서 저리 내용도 없는 책들을 읽힌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어요.
사실, 이런건 학부모의 권리로 요구하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직도 전집이 좋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님과 학부모들이 있거든요.

그리고...
머리 잘랐다고 못알아 보고 우는 아이가 너무 귀엽네요..ㅎㅎ
그걸 어르고 달래는 감은빛 님도 수고하셨네요~ㅎㅎ

감은빛 2011-06-07 13:01   좋아요 0 | URL
전집도 어떤 건 그래도 좋아보이는 것도 있잖아요?
이번에 제가 언급한 건 정말 쓸모없는 전집이더라구요.
무슨 일관된 주제도 없고, 각 권마다 특성도 없고.
초기에 우리 아이는 안받기로 했을 때, 조금 얘기해봤지만,
어린이집 입장은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고 있더라구요.
좀 더 얘기하려면 서로 감정을 상하게 될 것 같아서,
어떻게 할까 고민중입니다.

설마 우리 아이가 머리모양 바뀌었다고 못알아볼줄이야~!
그래도 하루 지나니까 다시 알아보더라구요. ^^

따라쟁이 2011-06-0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머리카락 짧은 남자는 반대 입니다. ㅎㅎㅎ
어깨에서 토닥토닥 하는 아이의 손이 자꾸 생각나서 씩 웃었어요.

뭐.. 건강히 잘 계시는건. 저의 똑똑한 스마트 폰 덕분에 확인했고. 여름에도, 일에도, 한숨에도 지지 마세요 ^^

감은빛 2011-06-07 13:02   좋아요 0 | URL
앞머리가 유난히 짧아져서 좀 기분이 상했었어요.
주위에서도 다들 너무 어려보인다고 한마디씩 하구요.
그래도 뭐 며칠 지나니까 조금은 익숙해지네요.
금방 길겠죠. ^^

루쉰P 2011-06-05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술에 어린이집 전집 강매에 자신의 아이가 몰라보다니...이거 왠지 삼중고를 겪으신 듯해 마음이 짠한데요. 어린아이 책은 전집보다는 낱권으로 좋아하는 책들을 부모님들이 골라서 읽히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헌책방에서 일을 할 적에 가장 많았던 책이 어린이 전집이에요. ^^;; 거의 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판형은 커서 일할 때 얼마나 애를 먹였는지 모릅니다.
흠..하여튼 이 놈의 국가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요.
아이가 아빠를 못 알아 본다니 이거 염려가 많이 되는 데요. 저도 그래서 긴머리를 고수하고 있어요. 혹시나 우리 가족이 저 못 알아 볼까봐요. ^^

감은빛 2011-06-07 13:05   좋아요 0 | URL
전집은 정말로 아이들이 커버리고 나면 애물단지가 되곤하죠.
좋은 단행본은 두고두고 물려주거나, 아이가 커서도 볼 수 있지만,
전집은 딱 나이가 지나버리면 거들떠보지도 않거든요.

저도 왠만하면 긴 머리를 유지하려고 애씁니다만,
해마다 여름이면 짧은 스포츠 머리가 부럽기도 하더라구요.

비로그인 2011-06-05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는 시력이 나쁜데 가끔 머리 다 깎고 안경 쓰면 ..ㅎ 이상하게 변해 있을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최대한 머리 깎기를 늦추기도 합니다.

아이가 참 귀엽습니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고, 반찬까지 만드시는 감은빛님은 좀 멋지게 느껴지네요~

감은빛 2011-06-07 13:10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저두 그래요!
눈이 나빠서 안경을 벗고 있으면 잘 모르겠더라구요.
처음에 어떻게 깎을지 물어볼 때, 설명이라도 잘 해야하는데,
다른 데서는 말을 잘 하는데, 유독 머리 깎을 때는 어리버리하게 되더라구요.

저의 피곤한 일상을 멋지게 봐주셨네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