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참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다. 오랫동안 소설을 읽지 못했지만, 그래도 읽고 싶은 책들은 꾸준히 사 모았다. 책장 한쪽에 쌓여있는 아직 읽지 못한 소설들을 보면서 언제 이걸 읽나 생각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연말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된 어느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읽기로 했다고 공지를 했다. 그리고 작가님도 모시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날 바로 책을 구매해서 읽었다.

제 15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이며, 세상에서 가장 ‘못된’ 소녀의 지독한 성장기라고 띠지앞면에 적혀있었다. 그리고 띠지 뒷면에는 “엄마의 구멍을 찢고 바깥으로 나왔던 그 순간, 나는 이미 끝을 경험했다.”라고 인용문을 적어놓았다. 이 한마디 강렬한 문장이 호기심을 불러왔다. 어떤 얘기인지 몰라도 문장이 꽤나 괜찮아서 재미있을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지점은 그 사람의 문장력이다. 물론 번역서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지만, 국내 작가의 경우 이야기 자체보다는 문장력이 뛰어나서 좋아하는 책들이 있다. 이 책도 그런 책이 될 것 같은 예감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내 기대는 정확했다. 글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재밌었다. 몰입해서 책을 읽다가 문득 작가에 대해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독서모임에서 만난 최진영 작가는 의외로 엄청 귀여운 외모였다. 책 날개부분에 실린 사진을 미리 보고 나갔지만, 작가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 그날 모임에 참여했던 열댓 명의 참여자들 대부분이 작가를 못 알아봤다. 역시 사진이란 건 믿을 게 못되는 구나 생각하며 작가의 얼굴과 사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작가를 모셔두고 우리는 책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작가의 얘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나서 ‘소녀를 기억해주세요.’라는 글과 함께 사인도 받았다.

이 책은 소녀의 성장기라고 하는데, 나는 판타지를 읽는 느낌이었다. 한편의 잘 만들어진 판타지 소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밑바닥 인생들이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소녀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펼쳐지는 모험담이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번듯하게 잘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지지리 궁상도 그런 궁상들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따뜻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긋지긋한 가난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지만, 생판 모르는 소녀를 아끼고 돌봐주었다. 황금다방, 태백식당, 폐가, 각설이패의 트럭을 거치며 소녀는 살아남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소녀의 이름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알 수 없다. 언나, 간나, 꼬마라고 불리다가 나중에 또래 친구들이 자신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유나’라는 이름을 지어주지만, 소녀의 부모가 지어주었을 진짜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소녀는 스스로 ‘드드득’이란 이름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으며, 소녀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태명은 ‘평화’ 라고 했다. 작가는 제목에서 소녀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조차도 없는 소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 같은데, 정말 이름이 뭔지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다. 부모에게 이년 혹은 저년으로 불렸던 소녀는 이름이 없었을까? 왜 소녀의 부모는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을까.

처음 읽었을 때는 강렬한 문장에 사로잡혀 빠르게 읽었는데, 다시 한 번 더 주요부분들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이야기가 조금 더 정교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되는 지점들이 있긴 했다. 이미 인생을 달관한 소녀의 내력에 대해 좀 더 친절한 소개가 있었으면 좋았겠다. 라고 아쉬움이 생기기도 했다. 작가의 다음 작품을 만나게 된다면 조금 더 완성도를 높여주길 바란다.

인생이라는 긴 모험에서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언젠가 내 옆을 스쳐갔을 혹은 앞으로 스쳐가게 될 소녀를 기억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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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1-05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이 참 좋아요.^^

감은빛 2011-01-06 14:2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제목이 맘에 들더라구요.

Arch 2011-01-05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안녕하세요~

작가가 '귀엽다'도 아니고, '엄청 귀엽다'란 부분이 참 예뻤어요. 어떤 소설일지 궁금한데 요샌 소설에 푹 빠지질 못해서 읽을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문장, 감은빛님이 괜찮다고하신 문장이 어떨지 궁금해요.

감은빛 2011-01-06 14: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 책 재밌고 매력적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아마 푹 빠지실겁니다! ^^

stella.K 2011-01-0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저도 이 책 좀 빌려줘요!ㅋ

감은빛 2011-01-06 14:21   좋아요 0 | URL
그럼 우리 서로 바꿔볼까요? ^^

아이리시스 2011-01-11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이렇게 예쁜 책이 밑바닥 인생들이라니, 아이러니하네요.
소녀 좋다, 심지어 소녀가 주인공!
작가도 만나시고 사인도 받으셨으니 더 기억에 남는 소설이겠네요.
저도 기억해둘게요~^^

감은빛 2011-01-12 02:55   좋아요 0 | URL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조금씩 건드려주고 있어서,
나름 의미가 있는 소설입니다.
젊은 작가 답지 않게 필력이 좋습니다.
한번 손을 대면 쉽게 손을 떼지 못할 정도로 집중력이 있구요.
결론적으로 아주 좋은 책입니다.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