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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훨 간다 ㅣ 옛날옛적에 1
김용철 그림, 권정생 글 / 국민서관 / 2003년 4월
평점 :
나와 동생이 아직 어릴때 아버지는 우리를 재우기 위해 종종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버지는 목소리를 좌악 깔고 '옛날 하고도 아주 아주 머~언 옛날에'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야기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고 '또 아주 아주 아주 먼 옛날에' 그리고 '또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먼 옛날에'가 반복되었다. 내 기억속에 아버지가 해주신 옛날 이야기가 온전히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다. 그저 '아주 먼 옛날에'가 무한 반복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와 동생은 그래도 무척 재밌어하고 많이 웃었다. 무한 반복 되는 '먼 옛날에'를 들으며 웃다 잠이 들곤 했다.
이제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옛날 아버지처럼 아이에게아이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입장이 되고 보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니 딱히 떠오르는 이야기 꺼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아버지 흉내를 내었다. '옛날 하고도 아주 아주 머~언 옛날에'로 시작해서 '아주 먼 옛날에'가 무한 반복되었다. 우리 아이도 처음에는 무척 재밌어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똑같은 전개가 반복되면 일단 나부터나부터 지겨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무렵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일단 내가 재밌었다. 아이에게 읽어주니 아이도 무척 좋아했다. 아이도 나도 옛스런 멋을 잘 살리고 해학적인 느낌이 강한 이 그림이 무척 좋았다. 이 책은 이야기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억양과 운율을 잘 살려서 읽어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아이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을텐데도 이 책을 무척 좋아하고 흥미를 가졌다.
계속 읽어주었더니 나중에는 내용을 다 외웠다. 혼자 그림을 보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읽어준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라 말하면서 읽었지만, 혼자 읽기도 여러번 하다보니 내용이 바뀌었다. 아이는 그림을 보면서 원래 이야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이제는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원래 이야기를 잘 못 기억해서 그렇게 읽은 게 아니다. 아이는 매번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중이었다. 재밌었다. 아이의 상상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을 미처 몰랐다. 옛날 이야기 하나 제대로 못해준 못난 아빠에 비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그 깨달음 이후로 나의 옛날 이야기도 진화했다. 나도 매번 상황을 조금씩 바꿔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녹슬었던 내 상상력에 조금씩 녹이 벗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아이와 내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며 어느 인물을 등장 시키면, 거기에 아이가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고 내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면 다시 아이가 다른 상황으로 몰고 가버린다.
어른의 스승은 아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새삼 그 말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인가를 깨닫는다. 나는 매일 아이를 보면서보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사실들을 문득 깨우치게 된다. 소중한 깨달음을 일깨워준 이 책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언젠가 아이가 자라면 이 이야기를 꼭 전해주고 싶다.
아, 그리고 김용철 작가님 그림이 참 멋지다! 이번에 <너희들의 유토피아>를 읽다가 김용철 작가님의 그림을 보고 이 그림책을 떠올렸다. 마침 예전에 써놓은 글을 알라딘에 등록하지 않았던 기억이 나서 옮겨본다. 약 2년전에 적었던 글. 내년이나 내후년쯤 둘째아가가 자라면 또 이 책을 열심히 읽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