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하루하루를 지나가나면 참 많은 일들이 가슴에 남는다. 좋은 기억도 있고, 씁쓸한 기억도 있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짜증나는 기억도 있다. 잠이 들기 전에 가만히 하루를 되돌아보면 세상이란건 참 재밌는 곳이란 생각이 든다. 

장면 1. 

며칠 전, 전날 새벽까지 술을 퍼마신 덕분에 지각을 했다. 깨질듯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곧 들어올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앉는다. 오후에 거래처 방문 일정을 조율하느라 동료랑 열심히 문자를 주고받고 있는데, 갑자기 앞으로 쭉 뻗은 다리로 스르륵 교복치마가 내려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여학생이 내 옆에서 교복 치마를 벗었는데, 나는 문자 메시지를 완성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그게 무슨 의미지도 깨닫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경악은 잠시 후, 내 곁에 있던 한 아줌마의 표정을 보고나서야 찾아왔다. 잠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 여학생이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어서 당장이라도 얼굴을 쳐다보고 싶었지만, 치마가 내려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 곁에 서있던 아줌마는 아주 황당한 표정으로 그 여학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직접 쳐다볼 수 없었기에, 그 아줌마의 표정으로 대충 어떤 상황인지를 짐작해야만 했다. 아줌마의 표정을 분석해본 결과 이 여학생이 교복 치마 아래에(그러니까 속옷 위에) 뭔가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슬쩍 곁눈질로 돌아보니, 아주 짧은(무릎에서 한 뼘이상 올라오는) 미니스커트를 걸치고 있었다. 여학생은 교복 치마를 접어서 가방에 넣은 후에, 교복 재킷을 벗어서 가방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다른 재킷을 꺼내서 걸쳐 입었다. 

그리고 열차가 승강장에 들어왔다. 의자에서 일어설 때 보니, 처음 교복을 입고 나타났을 때의 학생 분위기는 이미 없고, 성숙한 아가씨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함께 열차에 오른 후에 이 여학생은 가방에서 화장도구를 꺼내어 오랫동안 볼터치를 하고 눈주변을 꾸몄다. 그야말로 대변신의 순간이었다. 

뭐 어디가는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변신이 필요한 장소로 가는 거라고 짐작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교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는 건 좋은데, 하필 지하철 역 승강장에서 치마를 벗는 건 뭔가? 하필 술이 덜 깬 내 옆에서 웃을 벗는 건 또 뭔가? 정말이지 술이 덜 깨서 헛것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장면 2. 

얼마 전, 존경하는 선배로부터 일종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지금보다 훨씬 나은 대우에, 안정적인 자리였다. 하지만 현재 일터로 옮겨온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는 현재 일터에서의 생활에 나름 만족하고 있던 터라,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그 제안에 별로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내가 잘 아는 다른 친구도 나와 똑같은 제안을 받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들었다. 결국 그 친구가 거절한 자리가 뒤늦게 나에게 찾아온 거였다. 뭐랄까 좀 거시기한 기분이었다.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복잡미묘한 기분이다. 

장면 3

오랫만에 한 친구를 만났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나보다 훨씬 일찍 출판계에 들어온 업계 선배다. 그동안 서로 존대를 하며 교류하다가, 몇 번의 술자리를 갖고 나서, 슬슬 말을 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딱 계기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어색하게 존댓말과 반말 섞인 어정쩡한 대화를 이어가다가 어제 술자리를 계기로 서로 말은 놓고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말을 놓자마자 하는 말이 내 인상이 차갑단다. 그 차가운 느낌 때문에 선뜻 말을 놓지 못하고 지금까지 지냈다는 것이다. 무척 반듯한 모범생 이미지가 느껴지는데, 그 이면에는 차가운 인상이 있다는 거였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내가 차가운 인상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어딜가면 대부분 따뜻한 인상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새벽, 세수를 하다가 오래도록 거울을 들여다본다. 내가 차가운 인상이라고? 글쎄 잘 모르겠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자꾸만 어깨가 움츠려든다. 이럴때 본격적으로 몸을 좀 만들어야 할텐데, 이상하게 이번 가을엔 술의 유혹이 심하다. 가을은 이미 지나가고 겨울이 찾아온 듯한 날씨인데, 내 마음은 이제서야 가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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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28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술이 확 깨셨겠는데요? 아하하, 기가 차긴 하지만 보기 드문 구경이겠어요.
2. 음.. 복잡미묘한 기분, 진짜 수긍 갑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 있거든요.
3. 감은빛님이 차가운 인상인지 꼬옥 확인하고 싶지만,,, 큭큭
저도 처음 본 분들이 좀 차갑게 생겼대요, 하지만 한번만 웃으면 싸악 풀린대요~
감은빛님께서 요즘 바쁘고 스트레스 쌓이셔서, 무표정하게 다니셨을까요?

날이 풀리네요. 좋은 일 가득하세요!

감은빛 2010-10-28 13:13   좋아요 0 | URL
어제 새벽까지 술마시고 들어와서 이 글을 두드렸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대체 내가 왜 글을 두드렸는지 모르겠네요.
그때 나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걸까요?

저는 오히려 편안한 인상이라는 얘길 자주 듣는 편입니다.
차가운 편이라는 건 오히려 제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갖고 말한건가 싶기도..
그렇다해도 그 친구에게 그런 얘길 들은건 참 의외였어요.

점심먹고 돌아오니, 날이 좀 풀렸네요.
마녀고양이님도, 좋은 일이 잔뜩 생기기를 바랍니다! ^^

양철나무꾼 2010-10-2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그러면서 기선제압하고 호형호제하고...그런 거 아닌가요?
인상이 차갑다는 거지,인간성이 차갑다는 건 아니잖아요~

암튼,그 친구 분 좋지 않은걸요~
편안한 인상의 감은빛님을 이렇게 술렁이게 만들고 말야.

이 동네 '가을'에 주의보,대피령 발령해야 겠는걸요~^^

감은빛 2010-10-29 12:28   좋아요 0 | URL
기선제압하거나 그럴만한 사이는 아닌데, 암튼 좀 의외였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을 좀 해봤는데,
통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잊어버릴려구요.

이번 가을은 바빠서 '가을이다!'하고 한번 숨돌릴 여유도 없이 지나가네요.
유난히 술약속이 많은 시기였어요.
겨울이 오면 뭔가 변화가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