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교생선생님이나, 결혼 전의 선생님들에게 항상 졸라대던 게 있었다. 바로 '첫사랑'이야기였다. 조금 남는 시간이 생기거나 질문이 있냐고 물어보면 늘 '첫사랑' 타령이었다. 그럴때면 선생님들은 묘한 미소를 띄우며 다른 이야기로 주의를 돌리거나 아예 다시 수업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나중에는 내가 그 처지를 고스란히 겪게 되었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종종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곤 했는데, 조금 시간이 남아 아이들에게 쉬는 시간을 주면 앞쪽에 앉은 여학생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선생님!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딱히 옛날에 선생님들이 어떻게 했던가 기억을 떠올린 것도 아닌데, 나 역시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거나, 그래도 안통하면 아예 다시 책을 펼치며 수업을 이어가겠다고 해서 원성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오래전에 '작가들의 첫사랑'이란 주제로 여러 작가들이 겪었던 짧막한 첫사랑 이야기들을 엮어서 낸 책이 있었다. 워낙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 제목도 가물가물 한데 거기에 등장한 유명한 작가들의 첫사랑 이야기들이 참 인상적이어서 여러번 읽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집에선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고향 집에 있는 것 같다.  

왜 갑자기 첫사랑 이야기냐고? 계기가 있다. 지난 주 목요일로 거슬러 간다.

지난 주 목요일 저녁 아내가 홀로 외출을 했다. 아이들을 내게 맡긴채로 혼자 외출한 건, 둘째 태어나고 거의 4달만에 처음이었다. 아내가 간 곳은 '여성노동자 글쓰기모임'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이 있는데, 앞으로 달마다 나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둘째가 분유를 잘 먹는 편이 아니라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뭐 아내도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아야 하니까, 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나가라고 했을 거다. 

아마 한 두어 달 쯤 전이었던 것 같다. 아내가 느닷없이 '여성노동자 글쓰기모임'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던 게. 아니 꽤 오래전에도 한번쯤 얘기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냥 말로만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아마 해마다 가을쯤 강좌를 열었던 것 같은데, 그 강좌를 듣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제일 무난할 거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서, 아내는 직접 운영자인 박수정 선배의 블로그에 글을 남겼고,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며칠이 지나서 수정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엔 수정선배인 줄 몰랐다. 한참 얘길 하는데, 아내얘길 꺼내길래, 누군가 아내 친구이거나, 아내 일과 관련된 사람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었다. 그런데 글쓰기 모임 얘길 듣고서야 머리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수정선배였다. 나는 아내의 연락처를 알려줬고, 수정선배는 직접 아내에게 모임 일정을 알려줬다.

지난 주 첫 모임에 다녀온 아내는 그날의 주제가 '첫사랑'이었다고 전했다. 대부분 결혼하고 아이들이 클만큼 커서 어느정도 시간에 여유가 생긴 아줌마들이었다고 했다. 나는 예전에 강좌 진행에 도움을 주기위해 두어번 참여해봐서 대충 주요멤버들은 알고 있었다. 아내의 얘길 들으며 몇 년 만에 그 사람들의 얼굴들을 머리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암튼 그날은 주제가 주제인지라 그 자리를 나서는 순간부터 그 시간에 들었던 말들은 절대비밀에 부쳐야 했다. 

단 한 명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르포작가 박수정 선배였다. 수정선배는 현재의 남편인 경동선배가 첫사랑이었다고 하며 남편 자랑을 했다고 한다. 하긴 내 기억에도 수정선배가 경동선배를 위하는 마음은 참 대단했던 것 같다. 시인과 르포작가. 글쓰는 사람들끼리 부부가 되면 낭만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르포작가 박수정 선배와 시인 송경동 선배의 책들) 

아내는 절대비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는지, 수정선배의 이야기 외에 다른 사람의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물론 본인의 첫사랑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았다. 그날의 분위기와 인상적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내가 아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면 몇 마디 거들어주면서, 얘기해주지도 않을 남의 첫사랑 이야기에 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내 첫사랑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서투르고, 멍청하고, 바보같았던 내 모습과 따뜻한 웃음을 띄운 귀여운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도 그리고 그때 이후로도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실을 절대 숨기지 못하는 편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눈치챌만큼 그 사람에게 빠져드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차라리 남들이 알아채기 전에 먼저 그 사람에게 표현을 하는 편이다.(고백이라기보다는 좋아한다는 느낌을 전해주는 정도랄까!) 

첫 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만난 자리에서 확실하게 호감을 느꼈다. 그리고 두번, 세번 만날때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불타올랐다. 그녀는 정말 얄밉게도 내 마음을 살짝 흔들어놓을만큼만 내게 관심을 나타냈다. 아마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주변 친구들이 다 알게되었고, 그녀도 알고 있었을텐데. 그래서였을까 만날 때마다 조금씩 더 잘해주는 그녀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수많은 일들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많은 일들이 지나간 후에 조금은 잔인한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고, 다시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비교적 담담하게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을 정리할 수 있었다. 

군대가기 전에 나는 첫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한 편 썼다. 당시 동아리 회장을 맡은 후배 녀석이 동아리 회지에 실을 원고를 달라고 졸라서 입영열차를 타기 전날까지 열심히 연필로 적은 원고를 건네준 기억이 난다. 황당한 건 이 녀석이 결국 회지를 내지 못했고, 그 원고는 어떻게 되었는지 찾지도 못했다는 거였다.(휴가나왔을 때, 내 원고를 타이핑 했다는 새내기 여자후배를 만난 기억은 있다. 글을 읽고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해 했다고..... 아마 시커먼 군인이 그 글의 주인공임을 알고 곧바로 궁금증이 사라져버렸겠지만!) 물론 노트에 적어놓은 초고는 갖고 있었다. 나중에 문학동호회에서 활동할 시절에 그 초고를 다시 손보곤 했다.  

한창 글을 열심히 끄적였던 시절에 썼던 단편소설이 여러 편 있다. 대부분 남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내 원고들을 꺼내놓았던 건, 한창 활동했던 문학동호회 게시판과 후배들의 등쌀에 못이겨 실었던 동아리 회지와 학회지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첫사랑 이야기는 동호히 게시판에 한 번 올렸다가 단지 '표현방법이 신선하다' 정도의 평을 받고 낙심하여 아무 곳에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 후로 다시는 이 원고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 아주 오랫만에 그 글을 열어보았다. 지금 읽으니 왜이렇게 유치하고 조잡하기만 한지. 그 당시에는 그래도 스스로 만족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도저히 읽어주지 못하겠어서 그냥 다시 닫아버렸다. 역시 첫사랑에 대한 추억은 그냥 추억으로 묻어두는게 가장 좋은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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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9-16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감은빛님.
저는 왜 감은빛님이 여자분이라고 생각했을까요? ^^

첫사랑. 아름답게 했으면 참 좋았을건데... 라는 아쉬움이 조금 드는 주제입니다.
이제는 서서히 잊혀져가는 기억 중 하나네요.

lo초우ve 2010-09-16 11:47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도 감은빛님이 여태껏 여자분인줄 알았어요 ㅋㅋ
첫사랑은 누구나 다 있는거라 생각되어요 ^^
아직도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되는데..
이름도..
신장도..
성격도..

그렇지만, 지금은 까마득한 옛 추억이 되었어요 ^^



감은빛 2010-09-17 07:0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하얀안개섬님

그랬군요. 저도 궁금하네요.
왜 제 글만보고 저를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까요?
예전에도 그런 분이 여럿 계셨거든요.

어느 게시판에서는 육아에 대한 글들을 종종 올리곤 했는데,
거기서도 대부분 저를 여성으로 생각하시더라구요.
심지어 글 내용에 늘 '아빠'라는 단어를 적어놓았음에도 말이죠.

첫사랑 참 가슴 설레게 하는 단어였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니 이제는 다소 무덤덤해지는 것 같아요.

꿈꾸는섬 2010-09-17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저도 감은빛님이 여자인줄 알았다가 위의 글들 읽다보니 남자셨군요.ㅎㅎ 아무래도 닉네임이 너무 예뻐 그런 착각을 한 것 같아요.^^

감은빛 2010-09-18 01:06   좋아요 0 | URL
필명 때문에 생기는 오해인가요?
알라딘에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셨다니 조금 예상밖이네요.
그래도 예쁘게 봐주신다니 감사한 일입니다! ^^

양철나무꾼 2010-09-1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수정님과 송경동님을 선배라고 부를 수 있는 감은빛님이 왠지 멋져 보이는 걸요~^^

저도 첫사랑은 추억으로 묻어두고 술먹고 코가 삐뚤어졌을때나 한번씩 꺼내봐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수정님은 아주 조금 불행하시겠는걸요~^^

감은빛 2010-09-18 01:12   좋아요 0 | URL
경동선배와는 평택미군기지 투쟁때 인연을 맺었고, 한미FTA 투쟁, 기륭비정규직투쟁, 용산참사대책위 등등 다양한 곳에서 함께 활동했었어요. 수정선배와는 기륭비정규직투쟁때 알게되었고, 출판과 관련해서도 인연이 있었어요.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그 열정적인 삶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수정선배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