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어제 하루종일 정부에서 발송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우리말로 한 번, 영문으로 한 번. 여러차례 왔는데 계속 같은 내용이었다. 낮에 일을 하느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광화문에 가지 마라는 내용 같았다. 저녁에 총회에 참여하고 있을 때에도 같은 내용의 문자가 왔다. 누군지 잘 알지 못하는 한 무리의 연예인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도 전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들이 세상의 전부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은 없지만, 나도 젊은 시절에는 좋아하는 가수들이 있었으니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들 때문에 온 나라가 이렇게 난리통이 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아, 옛날에 뉴키즈온더블럭이 우리나라 왔을 때에도 난리라 났었다고 했던가? 압사 사고로 한 명이 숨지고 약 7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래 이태원 참사 같은 사고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제발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기를. 광화문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역할

2월과 3월에는 시민단체와 협동조합 총회 시즌이라 엄청 바쁘다는 얘길 계속 썼는데, 어제는 내가 회원으로 적을 두고 있는 시민단체 한 곳과 감사를 맡고 있는 협동조합 한 곳의 총회가 겹쳤다. 시민단체에는 미안하지만, 감사로서 협동조합 총회에 빠질 수가 없었다.

여기 조합에서는 거의 매번 서기를 맡아 의사록을 작성해왔다. 어제가 제8회 총회였는데, 아마 내가 서기를 맡은 것이 6번? 7번 정도 될 것이다. 서기라는 역할을 맡아 총회 의사록을 작성하는 일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맡는 것 자체는 괜찮지만, 매번 미리 부탁하지 않고 너무 당연하게 내가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좀 기분이 나빴다. 최근 몇 년간 계속 그랬었다. 어제는 일부러 노트북을 안 갖고 갔었다. 또 서기를 맡아달라고 하면 노트북이 없어서 못 한다고 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일찍 도착해서 잠시 쉬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내가 먼저 물어보고 말았다. 오늘 서기는 누가 해요? 총회를 총괄하는 이사이자 친한 선배는 너무 당연한 표정과 말투로 니가 해야지. 라고 말했다. 나 노트북 없는데. 라고 했더니 그럼 노트북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갖다달라고 하라고 말했다. 어차피 지금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상황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서기를 맡길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내가 노트북을 가져오는 것이 낫다 싶었다. 그 선배의 차를 빌려서 노트북을 가지러 다녀왔다.

감사는 총회에 감사보고서를 제출하고 직접 그 보고서를 낭독한다. 나는 총회 시작 전부터 의사록을 작성하느라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었는데, 감사 보고 순서가 되어 기록을 멈추고 감사보고서를 읽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집에서 감사보고서가 있는 쪽수를 찾으면서 감사도 맡고, 서기도 맡아서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네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저에게 한 가지 역할만 맡겨주세요. 서기는 다른 사람이 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총회가 진행되는 내내 다른 사람들의 발언을 듣고 정돈된 말투로 고쳐서 기록하는 일은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다. 총회가 끝나고 다른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뒷풀이 음식을 먹거나 할 수 있지만 서기는 나중에 정리하려고 미뤄둔 내용을 마저 기록해야 하고, 놓친 내용이 없는지, 오탈자는 없는지, 내용에 오류는 없는지 여러차례 점검해야 한다. 총회가 끝나고도 꽤 긴 시간 내가 혼자 의사록을 마무리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한쪽에서 먼저 뒤풀이를 시작해 먹고 마시고 놀고 있었다. 엎드려 절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미리 부탁하지도 않고 너무 당연하게 일을 맡기는 태도와 남들 다 놀 때에도 혼자 일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누구도 수고해줘서 고맙다는 말 한 마디를 하지 않는 것은 기분이 나빴다. 정말 내년에는 절대 서기를 맡지 말아야지.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준비하는 총회에서도 너무 당연하게 오랫동안 한 사람에게 서기를 맡기고 있었다. 물론 나는 미리 부탁하면서 매번 맡겨서 미안하다고 여러 차례 사과를 하고 당일 뭔가 불편한 점은 없는시 신경써서 챙겨주고, 총회 끝나고 내가 뒷정리를 하는 동안 그가 혼자 의사록을 마무리 할 때 고생시켜 미안하고, 수고 많았다고 말하곤 한다. 사실 내가 서기를 주로 맡아온 협동조합은 총회 의안이 상대적으로 그리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챙겨야하는 조합은 총회 안건이 아주 어렵고 복잡하다. 매번 서기를 맡아주는 그 친구가 아니면 그 내용을 즉각 기록하기가 쉽지 않다. 그 사람 외에는 정말 대체할 사람이 없어서 매번 미안한 마음에도 그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어제 일을 겪으며 역지사지 라는 말을 다시 절실하게 깨달았다. 나부터 그 친구에게 훨씬 더 고마움을 표현하고 가능하면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을지, 정 안되면 내가 서기를 맡더라도 한 번은 서기를 맡지 않고 맘 편히 총회를 즐길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총회 시즌도 마무리되어 간다. 다음주 토요일에 임원을 맡고 있는 총회 하나를 더 마치면 드디어 지겨운 총회 시즌이 끝난다. 어제 뒤풀이에서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여러 시민단체와 협동조합에 나처럼 겹쳐서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우스개 소리로 법이나 조례로 몇 개 이상 역할을 못 맡게 만들어야 한다고. 나는 속으로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빌었다. 나도 좀 퇴근이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암튼 이제 일주일 남았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토요일이지만 또 회의하러 가야한다. 내일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잠만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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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3-21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계속 문자를 받고 있어요.BTS 세계투어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는데 한국에서 무료 콘서트를 한다고 하니 많은 아미들이 좋아한다고 합니다.특히나 BTS가 가지 않은 중국의 경우 중국의 이미들이 광화문 콘서트를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한국으로 날아오고 있다고 하네요.
그러다보니 광화문 일대의 숙박시설과 식당가들은 오랜만에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하네요.BTS의 광화문 콘서트가 일대 직장인들에게 많은 불편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많은 자영업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인것 같습니다.

감은빛 2026-03-29 18:20   좋아요 0 | URL
BTS 공연 후폭풍이라고 말할 수있을 정도로 말이 많더라구요.
특히 광장을 연애엔터테인먼트 사기업에게 명분없이 빌려준 문제를
지적하는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공연 자체도 기대 이하라는 의견도 많더라구요.
일단 이 공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라고 보고,
그 피해를 회복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잉크냄새 2026-03-21 2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기라는 일이 일은 일대로 하고 티는 나지 않는 일인 것 같아요. 예전 중국생활 초기 총경리 아침 회의 서기를 맡았는데 토씨 하나 틀리는 걸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 총경리 때문에 아침 회의가 지옥같았던 일이 떠오르네요. 다음부터 돌아가며 하세요. 그래야 서기라는 일의 험난함을 알겁니다.

감은빛 2026-03-29 18:23   좋아요 1 | URL
잉크냄새님도 서기라는 일을 맡아 힘든 시기가 있었군요.
그렇죠. 말씀처럼 이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데,
전혀 티가 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의로 한 일이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려서 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다음부터는 맡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으니 이제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겠지요.